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D Dec 22. 2021

세계의 형태

듄 part 1 (2021)

수 천년 동안 우리는 조심스럽게 세대를 거쳐 하나의 정신을 만드려 했다.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고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자, 우리를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할 수 있는 자. 우리는 그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믿는다.

만일 내 앞에 펼쳐진 단 하나의 길에 죽음 혹은 그에 버금가는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리고 그걸 내가 알고 있다면, 난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아트레이드 가문의 몰락, 레토 공작과 유예 박사의 죽음, 폴과 제시카의 추방 등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큼직한 사건들은 정작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은 황제의 말 한마디로 벌어진 일이다. 하코넨의 수장 바론 남작의 말대로 질투심이 많다는 그 황제는 아트레이드 가문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모든 음모를 꾸며낸다. 권력자가 가진 힘이다.


권력자가 설계한 판 안에서 작고 미약한 사막쥐 같은 존재인 주인공 폴 아트레이드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살아남는다. 어머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여성단체 베네 게세리트의 일원으로, 폴을 앞서 언급한 '하나의 정신, 예지된 자'인 퀴사츠 헤더락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베네 게세리트의 기술을 가르친다. 흥미로운 지점은 베네 게세리트의 기술이 별다른 게 아니라 바로 마음가짐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전인적인 마음가짐.

두려워해선 안 된다. 두려움은 마음을 해친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가져오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다. 그것이 나를 지나서 통과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이 지나가면, 나는 내면의 눈으로 그 길을 볼 것이다.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을 것이다.


베네 게세리트에서 활용하는 다른 기술인 '목소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주장이 통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본다. 주장에 대한 근거를 덜 생각했거나 상대방이 두려워서 목소리에 자신감이 들어가지 않을 경우 우리의 말은 상대방에게 잘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베네 게세리트의 목소리는 상대방을 온전히 복종하도록 만든다. 베네 게세리트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다. 아무리 근거 없는 주장일지라도 하나의 생각이 마음속에서 온전히 긍정되고 합일된다면, 그 주장은 확신이 되어 상대방에게 먹힐 것을 '목소리'는 보여준다. 베네 게세리트의 기술에는 그 어떠한 우유부단이나 의심도 찾아볼 수 없다.


어머니에 의해 그 마음가짐의 기술을 단련한 폴은 초인적인 힘을 각성시켜주는 물질인 스파이스를 통해 꿈의 형식으로 미래의 단편을 본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도입부에서 한 줄의 문장을 제시한다.

꿈은 우리 심연의 메시지이다.  

꿈은 곧 내면 깊은 곳의 메시지. 우리는 틈만 나면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한다. 왜냐하면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공격할지, 화를 낼지, 어느 상황에서 비행기가 추락할지, 횡단보도 신호등이 언제 빨간색으로 바뀔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사회적 맥락과 시스템의 규칙성을 통해. 폴은 스파이스를 통해 그 능력을 한층 강화시킨다. 그렇게 그는 머릿속에 몇몇 단편들을 상상해낸다. 거대한 전쟁,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지된 자, 퀴사츠 헤더락의 자질을 점점 키워가고 있는 폴의 내면에서 예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퀴사츠 헤더락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폴은 이렇게 예지된 운명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사막이다. 서울에서 미세먼지 주의보를 발령하고 이에 대한 심각성을 보도하는 것이 부끄러워질 만큼 엄청난 모래바람과 먼지들이 휘몰아치는 곳이다. 500m 길이의 거대한 사막 지렁이는 덤이다. 황제의 모략에 의해 함정에 빠진 아트레이드 가문의 레토 공작은 제국의 환경학자에게 항의한다. 황제는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만들어놓았다고. 이에 대한 환경학자의 대답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 사막은 기계에게 다정하지 않아요. 전 당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라키스에는 당신 같은 분들이 그저 오고 갈 뿐이지요. 가족을 잘 챙기도록 하십시오. 이 사막은 인간들에게도 다정하지 않으니까요.

듄은 자연에 대한 영화다. 아니 어쩌면 자연을 위한 영화다. 듄은 인간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듄은 1965년 미국의 작가 프랭크 허버트가 집필한 장편 SF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는데, 작가는 역사적인 내용들을 소설 속에 녹여냈다고 한다. 가령 후추와 같은 향신료들은 유럽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는 금보다 값비쌌다. '향신료를 가진 자가 유럽을 지배한다'는 중세 시대의 유행어는 이제 소설 듄에서 '스파이스를 지배하는 자가 우주를 지배한다'로 탈바꿈한다. 또한 금, 석유, 목재 등의 확보를 위해 강대국들은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등 제3세계의 영토에 기업을 설립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환경을 파괴해왔다. 그곳에는 다양한 강대국들이 오고 갈 뿐이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아라키스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 오고 갈 뿐이다. 스파이스를 얻어 부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하지만 폴의 아버지가 생전에 아라키스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그곳의 토착민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도, 스파이스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토착민들의 힘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사전에 황제의 모략을 예상하고 있던 폴의 아버지는 그들을 통해 사막의 힘을 얻어 황제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폴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사막의 힘을 배우기로 한다. 사막은 우리에게 다정하지 않기에. 세상은 우리에게 다정하지 않기에.

삶의 기이함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겪어야 할 현실일 뿐입니다. 멈춰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의 흐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같이 흘러야 합니다. 모래의 진동과 파동과 함께 떠다녀야 합니다.

강력한 모래폭풍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버티려고 하면 뼈가 부러질 수 있다. 때로는 폭풍에 몸을 맡기는 것이 살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사막에서 방황하던 폴과 그의 어머니는 아라키스의 토착민인 프레멘들을 만난다. 사막의 힘을 배우기 위해서는 프레멘들의 무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들이 제안한 결투를 받아들이고 이겨야 했다. 폴은 프레멘들 중 한 명과 대결한다.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선 그를 죽여야 했는데, 폴은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길을 만들기 위해 그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했다. 깨어나야 했다. 인간의 세상에서 살인은 죄악이었지만, 자연의 세상에서 살인은 그저 약육강식의 현장이었기에. 폴은 이를 일깨워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대결하던 자를 죽인다. 사막의 힘을 얻기 위한 길은 그렇게 열린다.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때로는 기존의 신념을 깨야 할 때가 온다.


만일 내 앞에 펼쳐진 단 하나의 길에 죽음 혹은 그에 버금가는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리고 그걸 내가 알고 있다면, 난 그 길을 과연 걸어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이 그 길을 걷는 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다음 편이 무척이나 기대되는 영화였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살아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