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졌다고 믿을 때 생기는 지속성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택한 길이야." 그 말은 주체적이고 당당해 보인다. 스스로 결정했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문장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 말 안에는 "내가 그만둘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택했다고 생각하면 감정이 기준이 된다. 서운하면 멈출 수 있고, 억울하면 내려놓을 수 있고, 인정받지 못하면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쉽게 결론 내린다. 선택의 언어는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지속성을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대부분 화려하지 않은 자리에서 반복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눈에 띄는 성취보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더 많고, 박수보다 책임이 더 많은 자리다. 나 역시 그렇다. 엄마로 살고, 청년들을 멘토링하고, 기업의 마케팅을 대신 맡아 실행한다. 대단한 무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역할을 꾸준히 감당하며 살아간다.
엄마로 살다 보면 감정이 앞설 때가 많다. 아이가 기대만큼 해내지 못할 때, 말이 거칠어질 때, 내가 지칠 때. 그 순간 감정으로 반응하면 관계는 쉽게 흔들린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엄마인가. 이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가 자기 삶을 단단히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이 감정을 정리한다.
멘토로 설 때도 그렇다. 기대했던 헌신이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고 오해를 받을 때도 있다. 감정으로 일하면 멈추고 싶어진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 선 이유를 떠올리면 기준이 다시 선다. 나는 누군가를 성공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맡겨진 사람들이 자기 몫을 발견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결과는 내 통제 밖에 있다. 나는 방향에 충성할 뿐이다. 기업의 마케팅을 대신 맡아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단순히 광고를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고객사의 이름을 대신 들고뛰는 자리다.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칠 때 자존심이 기준이 되면 일은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이 일 역시 나에게 맡겨진 영역이다. 성과는 결과지만 충성은 태도다.
돌아보면 엄마, 멘토, 대표라는 역할은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내 안에서는 하나의 관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맡겨짐"이라고 부른다. 어렸을 때부터 내 삶의 근간에는 신앙이 있었다. 삶은 우연이 아니라 맡겨진 것이라는 관점, 지금의 자리가 스스로 쟁취한 전리품이 아니라 허락된 자리라는 믿음이 내 사고의 구조를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맡겨졌다는 것이 짐을 얹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담을 떠안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받았다는 뜻이다. 믿어주었기 때문에 맡겼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해석이다.
이 관점이 내 태도를 바꿨다. 억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감당하게 만들었다. 맡겨졌다고 믿으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를 믿어주었기에 그 신뢰에 보답하고 싶고, 나를 택해주었기에 이 자리를 가볍게 다루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역할을 "내가 선택한 일"로만 보지 않는다. "내게 맡겨진 일"로 본다.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감정이 앞서고, 맡겨졌다고 믿으면 감사가 앞선다.
나는 오랜 시간 느꼈다. 사명으로 일하면 지속성이 생기고, 감정으로 일하면 끊긴다. 감정은 순간에 반응하지만 사명은 신뢰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명 90, 감정 10. 감정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감정이 사명을 잠식하도록 두지 않는다. 서운함이 올라와도 피곤함이 몰려와도 기준은 바뀌지 않는다. 이 자리가 우연이 아니라 나를 믿고 맡겨주신 자리라고 생각하면 쉽게 떠날 수 없다.
이 원리는 청년들의 성장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들은 처음에는 책임감이 충분히 세워지지 않은 상태로 한대협을 찾는다.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맡은 일을 미루고 감정이 앞서 관계가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작은 역할을 맡고 반복해서 책임을 감당하면서, 피드백을 수용하면서 태도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해야 하니까" 하던 일이 어느 순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바뀐다. 그때 책임감은 사명감으로 자란다. 나는 그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감정으로 움직이던 청년이 기준으로 서기 시작하는 순간을. 능력이 갑자기 늘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단순히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받았다고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명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화려한 무대에서만 필요한 단어도 아니다. 반복되는 자리에서 끝까지 남게 하는 힘이다. "내가 선택했다"는 말은 멋있어 보이지만, "내게 맡겨졌다"라고 믿는 사람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지속성은 억지로 버티는 힘이 아니라, 나를 믿어준 그 신뢰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태도에서 나온다. 결국 사람을 오래 가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감사다.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