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아들이 셋이라는 것
동정과 사명 그 사이 어디쯤?
셋째를 낳고 맘먹고 간 산후조리원. 첫째는 시어머니께서, 둘째는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셋째는 내 인생에 마지막 산후조리가 될 거라 생각하며, 보통 하는 2주의 기간에 1주일을 더해 3주를 있기로 했다. 잘 먹고 잘 쉬며 건강해지리라!
산후조리원에서 첫 저녁을 먹는 시간.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나보다 한참 어린 엄마들이었다. 서른에 첫 아이를 낳았고, 서른일곱에 낳은 막내였으니. 맞은편에 앉은 젊은 엄마가 내게 다짜고짜 딸인지 아들인지를 물었다. 나는 아들이라고 말했고, 형제를 묻는 질문에 형이 둘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젊은 엄마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런다. "목메달이네~"
헉!!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그게 뭔지 왜 바로 이해가 되어 버렸을까? 딸과 아들을 어떻게 낳았느냐에 따라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연결 짓고, 나처럼 아들 둘, 또는 아들 셋을 낳은 경우는 '목을 매어야 할' 점수라는 거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에 가장 최악의 말이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딸을 못 낳았다는 것은 근대 우리 사회에서 아들을 못 낳아 소박 맞거나 구박을 당한 남존여비의 비인간적 취급에 비하자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일이겠지만, 입을 가진 어른들이라면 꼭 한 마디씩 하는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도 아들이라는 걸 알았던 날 나도 산부인과에서 눈물을 닦았으니까. 그러나 "딸도 하나 있어야 하는데~", "나이들 수록 엄마한텐 딸이 있어야 해~" 하는 말을 들으면 솔직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겉으론 "그러게요~"하고 씁쓸하게 웃지만, 속으론 아물지 못한 상처에 소금이 뿌려진다.
'그래서 어쩌라고!! 셋이나 낳았는데, 하나 더 낳으라고? 넷째가 딸이라고 누가 보장해 주지? 누가 딸 좋은지 몰라서 안 낳았나? 내 맘대로 안 된 걸 어쩌라고!'
하며 속으로 소리친다.
사실 아직도 이런 생각에서 못 벗어난 내가 나도 참 가엾다. 사람들이 왜 자녀들의 성별에 이토록 효용가치를 들이대며 평가하는 것일까? 결국은 부모에게 얼마나 득이 되나 되지 않나를 따지는 이기적인 생각이 밑바탕이지 않나? 과거 농업사회에서 생산력이 기준이 되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 더 많은 가족을 유입시킬 수 있는 아들을 선호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들을 낳으면 늙어 오라는 데가 없어서 객사하고, 딸을 낳으면 여행 가다 비행기에서 죽는다는 말을 버젓이 하는 사람들의 심리란 무엇일까?
"아빠를 닮았네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던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 로비에서 눈물을 훔쳤던 저녁, 나는 깊이 회개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막내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가슴을 움켜쥐며 울었다.
나는 아들이 셋이 아니라, **이, ##, @@라는 귀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임을 받아들였다.
이후에도 내가 아들이 셋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거나 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때면, "그렇죠... 출산율도 낮은 우리나라에서, 그 어렵다는 아들을 셋이나 키우니 천국의 맨 앞자리는 제 자리 아닐까요? " 하며 너스레를 떤다. 선행으로 가는 하늘나라도 아니고, 아들 키우는 것이 무슨 큰 선행도 아니면서도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큰 사명을 받은 것처럼 으스대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아직도 애쓰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한창 질풍노도를 달리는 사춘기 막내를 빼고, 위로 두 아이들은 아들이라 그런가라는 생각을 거의 해 본 적 없이 자라주었다. 자매 둘이었던 나와 내 여동생이 자라면서 싸웠던 걸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큰 애가 중학교를 가면서부턴 거의 말다툼도 없이 신사적인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큰 애 둘의 관계가 신기할 만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커갈 때마다 내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있었으니 바로 군대를 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오~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정말 간절히 바랐었다. 만약 종말이 온다면, 우리 아이들 군대 가기 전에 주님 오시라고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도했다. 아들 셋을 군대에 보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년 6개월씩 4년 반을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하다니 서글펐다.
왜 아직 통일이 안 되었지? 우리나라도 이스라엘이나 북한처럼 여자도 군대 가면 안 되나? 나는 갈 수 있는데, 불공평하단 생각까지 하며 아들의 입대 날짜를 기다려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셋 중에 가장 보송보송하니 뽀얗게 생긴 첫째를 논산 훈련소에 보내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입영식을 마치고 돌아서 운동장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사회에 있을 때 한껏 멋 부려 가꾸었을 머리 모양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빡빡 깎아 똑같이 짧은 머리를 한 아이들이 이제 훈련병이 되어 줄지어 나가는데 확 짜증이 밀려왔다. 아니 어째 이 나라는 아직도 분단국가란 말인가? 정치인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 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우리는 아직 총칼 겨누고 사느라 저 어린것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나? 싶어서 화가 나 눈물이 났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목을 빼고 이름을 부르는 가족들을 향해 아이들은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난 어쩐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이 떠올라서 울컥했다.
첫째의 입대 소식에 진심 어린 격려를 해 주는 지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한 주가 흘렀고, 드디어 첫 통화가 된 주말이 왔다. 잘 지내고 있단다. 그저 너무 감사했다. 그리곤 이어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치아 교정장치가 문제가 생겨 주말에 가까운 치과를 가려고 했는데, 자기가 다니던 치과가 논산서 한 시간 거리라는 걸 소대장님이 아시곤, 직접 대전까지 운전해 데려다주셔서 외출했다가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헉!!! 이럴 수가!!!
군대 좋아졌다는 얘기 듣기는 했지만, 훈련병을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다니! 정말 너무 감사해서 또 울컥했다.
첫째는 고 3 때, 체대 입시를 준비했었고, 체대 입학 후에도 손기정체육공원에서 달리기와 농구를 취미 삼아하고, 집에 내려와서는 입대 하루 전날까지 조기축구 아저씨들과 밤늦도록 축구를 할 만큼 운동을 좋아한 덕분에 훈련소 생활을 잘 견녀내고 있었다. 오히려 우수할 만큼이라 결국 조교를 권유받았다. 쉽지 않은 길이고 자기 성격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망설이던 첫째가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넘어보겠다는 용기를 내며 논산훈련소로 자대배치를 받게 되었다.
6주가 흘러 훈련소 수료식날, 입영하는 날 예약해 두었던 훈련소 근처 펜션에 아침 일찍부터 도착해 준비해 간 삼겹살을 비롯해 바리바리 싸들고 간 음식을 풀었다.
11시. 드디어 우렁찬 구호 소리와 함께 들어선 대한의 아들들. 배치도가 있어도 똑같은 군복에 모자에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는 천명의 군인들 속에 우리 아들이 있었다. 그 어딘가에. 수료식이 끝나고 모자를 벗어 하늘로 던지는 순간 아들을 알아보고 나는 첫째의 이름을 부르며 총알같이 스탠드를 뛰쳐나갔다.
그 사이 더 튼튼해지고, 건강해지고, 더 밝아졌다. 평소 늦게 자며 야식 하고, 늦잠 자서 아침을 거르던 생활 패턴이 건강하고 규칙적인 루틴으로 업그레이드된 탓이리라.
일찍 도착한 수료식장 옆 PX에서 평소 비싸 손이 잘 안 갔던 육포를 몇 개씩이나 장바구니에 담아 점심 먹고 먹이려 했는데, 육포를 보며 빙긋이 웃으며 군대서 부식으로 너무 자주 먹어서 그건 별로 안 먹고 싶다고 한다.
오, 마이 갓!
남편이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주어서, 또 아들 같은 군인들 덕분에 우리 같은 국민들이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며.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모르겠다, 나만 그런지. 나중의 효도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무탈하게 잘 자라주길. 그야말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길.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용기 있게 험한 세상 헤쳐나갈 수 있길.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이 되는 그날이 오더라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나의 후손들을 책임 있게 잘 키워내는 사람이 되길 기도할 뿐이다.
다만, 한없이 무너지고 싶은 그런 날이 올 때 엄마의 존재가 탄탄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덧붙여 바라는 게 욕심은 아니길.
대한민국에서 아들 셋을 키운다는 것은 욕심 많은 나로 하여금, 매일매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는 연습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