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앤 Apr 04. 2024

젊은 레이 차주가 가르쳐준 한 수

다시 배우다

얼마 전 큰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대전역에 주차를 했다. 시간이 오후라 주차장에 자리가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동광장 주차장에 들어섰는데, 한참 앞의 차 운전자가 내려, 꽉 막혀서 못 들어가니 뒤차부터 돌아 나가야 한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유턴할 자리가 있어 돌아 나왔지만, 서쪽 주차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밤늦게 돌아와야 할 텐데 멀리 댔다가는 깜깜하고 추운 밤에 오래 걸어야 할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일단 역에서 가장 가까운 대전역 선상주차장으로 직진했는데, 붉은 글씨로 만차를 알리는 안내가 내 차의 진입을 막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상황이 어떤지 한 바퀴 돌았다. 생각보다 더 안 보이는 주차자리에 애가 타기 시작했고, 내 차 한 대 둘 곳이 이렇게도 없나 한숨을 쉬면서 두리번거리느라 언제 오냐는 엄마의 전화를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황급히 끊어 버렸다.


결국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한번 돌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선상주차장 주차가능 안내표지에 "1"이 떴다.

로또에 당첨된냥 기쁜 마음으로 오르막길을 당당하게 올랐다.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넉넉히 잡고 왔으니 망정이었지, 여유 없이 왔으면 큰 일 날 뻔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런데 다시 한번 난관에 부딪혔다. 그 "1"이 말하는 주차가능구역 한 자리가 어딘지를 못 찾겠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또 선상주차장에서 빙글빙글 돌았고, 마침내 저 멀리 흰색 레이 옆 한 자리를 발견했다. 딱 봐도 좁아 보였지만, 지금 그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 사이 시간이 다 가고 있었고, 그렇게 돌다가는 기차를 놓칠 판이라 차를 구겨서라도 넣고 싶었다.

후방 카메라 덕을 톡톡히 보며 겨우 겨우 주차를 했으나 예상 대로 문이 제대로 다 안 열렸다. 내 차 오른쪽 차주가 좀 더 편안히 탈 수 있길, 왼편 레이차 보조석에 타야 할 사람이 있다면 딱 나만큼만 뚱뚱하길. 반도 채 열리지 않는 틈으로 배를 집어넣고 빠져나왔다. 내 배도 액체이던가? 고양이만 그런 게 아니구나 감사하며 역사로 뛰었다.


장례식장에 들렀다가 다시, 대전역으로 돌아왔을 땐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주차장을 빼곡히 메웠던 차들이 거의 빠져나가 있었고, 어두운 조명들 아래 멀리 내 차가 보였다. 그런데, 차 가까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운전석 옆 유리창에 못 보던 무엇인가가 보였다. 종이였다. 보라색 A4 종이를 반으로 접어 손으로 잘라낸 것 같은 사이즈에 볼펜으로 가득 쓰여 있는 편지였다.


편지엔 날짜와 시간을 언급하며, 자신의 운전 미숙으로 차를 빼려다가 내 차 왼쪽 범퍼와 전조등을 망가뜨렸다며, 죄송하다는 글이 씌어 있었다. 연락처가 없어서 쪽지를 남긴다며 편지를 보면 꼭 연락을 달라며 뒷번호가 같은 핸드폰 번호를 세 개씩이나 써 두었다. 가족들 번호일 거라 생각했다. 본인이 못 받았을 경우를 예상해서 적어 둔 것이리라.


밤이라 잘 안 보여 외관상 크게 달라진 걸 눈치 못 챘었는데, 확인해 보니 정말 범퍼가 긁히고 전조등도 조금 깨져있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차가 망가져서 속상한 것보다는, 구구절절 미안한 마음과 꼭 배상해 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레이 차주의 마음이 고맙고 훈훈했다.

편지에 적힌 글의 분위기로 보아 저녁 내내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싶어 적힌 번호 중 제일 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고 바로 연결됐다. 나는,

"여보세요? 아... 저는 대전역에 주차한 아반떼 차주예요~"라고 말을 건넸다. 전화기 너머로 30대 초반쯤 되었을 것 같은 목소리의 여자가 편지랑 똑같은 어조로 죄송하단 말을 되풀이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험회사에 사고 접수를 해두었으니 배상이 곧 이루어질 거라 말하며 다시 한번 죄송한단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놀라셨을 텐데,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하다, 다행히 차가 많이 망가지진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건넨 후 통화를 마쳤다.

역시나 기분이 참 좋았다. 잘못을 하면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왜 그게 감동적이었을까? 요즘 너무 뻔뻔하게 자기 허물을 숨기고, 변명하고, 적반하장으로 남의 눈의 티끌만 크게 보는 사람들의 뉴스에 고구마가 가슴에 얹힌 듯 답답해서였을까? 더한 사고를 치고도 뺑소니를 치거나 스스로를 속이며 모른 척하기도 더러 하는 세상인데...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조차 정직하게 자기 실수를 시인하고, 사과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참 훌륭한 인격의 사람을 만나다니!


그날 밤 통화를 마친 후에도 접수번호 등을 알려주는 문자를 몇 번 더 받았고, 남편으로부터 사고를 냈을 때 모범 답안 같은 일을 경험한 것이라며 사고 처리 과정을 잘 기억해 두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들에게도 오늘 엄마가 겪은 일이라며 편지를 보여주었다.


다음날 공업사를 들렀다. 내 차는 아반떼 신차였는데, 워낙 인기가 있어 부품 구하기가 쉽지 않은 차종이라 했다. 잠시 후, 사장님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고는 그나마 빨리 구했다며 열흘 뒤에 오라고 하셨다. 차를 탈 때마다 망가진 범퍼가 신경 쓰였지만, 차에 타면 안 보니까 개의치 않았다. 열흘 뒤, 내 차는 수리에 들어갔고, 범퍼가 일체형이라 6개월 전쯤, 오른쪽 범퍼에 내 실수로 살짝 긁은 곳까지 운 좋게 함께 교체되었다. 사고 전보다야 못하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다시 새 차가 되었다.


어느 책 제목처럼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로 누군가에게 실수를 한다면 그이처럼 겸손하게 시인하고,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걸 다시 배운 것 같다. 젊은 레이 차주가 내게 가르쳐준 한 수다.

그분께 감사를 전한다.

이전 05화 X라는 제자와 쫄보 선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