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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앤 Apr 13. 2024

서울 태생 시골 쥐의 서울 나들이 1.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맞다. 난 서울 태생이다.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참 곤란한다. '고향'이라는 말은 단순히 출생지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나고 자란 곳이며, 어릴 때의 추억과 친구들이 있는 곳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부산과 함양에서 각각 상경하신 부모님은 전태일이 노동운동의 화신이 되어 스러져간 바로 그 시대 그곳, 평화시장에서 일하고 계셨다. 두 분은 결혼하신 후, 아빠의 사업 실패로 세 살이 된 나를 데리고 울산으로 내려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만 3년도 채 살지 못한 서울을 고향이라고 대답하며, 사실은 출생지라고 굳이 사족을 붙이고 싶은 평생을 살았다.


우리 집은 어릴 때 잦은 이사를 해서 울산-부산-거제도-마산-거제도로 옮겨 다녔다. 중학교까지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거제도에서 보낸 후, 고등학교는 진주로 가면서 나는 넓은 세상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의 학창 시절은 너무나도 모범적이어서 학교-하숙집-도서관-거제도집 외에는 거의 다녀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호기심 대마왕인 내가 고등학교 3년을 쥐 죽은 듯 참은 이유는 단 하나였던 것 같다.

  "Seoul Dream"


그러나 그 3년의 수고가 하루아침에 와장창 깨져버렸으니... 우리 학번은 수능 1세대로, 8월과 11월에 수능을 두 번 친 세대다. 수능의 총점이 아니라 두 개 중 더 잘 본 시험성적을 선택하여 원서를 내는 방식, 그 때문에 나는 망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내신을 받았음에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대학을 진학했고, 어이없게도 그 이유로 대학 4년 내내 우울했다.


나는 왠지 서울을 가야 할 것 같았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알을 낳듯, 나도 나의 출생지인 서울을 찾아가서 거기서 살아봐야 할 것 같았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은 동물원의 '혜화동'의 좁은 골목은 대체 어떤 곳일지 궁금했고, '시청 앞 지하철 역'에 가면 나도 첫사랑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학전소극장에서 꼭 김광석 콘서트를 보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 꿈은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끝나고 말았지만.


내가 굳이 경기도로 임용을 본 참 허접스러운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시험 점수가 더 좋아야 하는 서울이 어렵다면, 근처 경기도라도 가야 했다. 나는 운 좋게도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도봉역에서 몇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 의정부로 첫 신규발령을 받았다. 정말 정말 기뻤다. 목표했던 서울보다 살짝 위까지 올라갔지만, 주말이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서울 구석구석을 쏘다닐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교회를 서울로 정해서 금요일 저녁, 토요일 오후, 그리고 주일이면 하루종일을 거의 교회 근처에서 살았다. 아직은 어렸던 그때, 교회 청년들과 함께 다닐 있었던 곳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교회에서부터 걸어서 남산타워(지금의 N타워)까지 갔던 것이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날도, 마로니에 공원과 창경궁에서 깔깔 거리며 웃고 이야기 나눈 기억들까지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혜화동'을 걸었고, '시청 지하철 역'을 수도 없이 지나쳤다. 아마 첫사랑도 지나쳐서 만난 거겠지?


의정부서 근무하던 시절 인천에서 근무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우리는 부천과 인천에서 몇 년을 더 살았다. 그 사이 나는 아이를 둘 낳았다. 그랬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듯, 나는 아이를 낳은 후, 내 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이곳, 충청남도 금산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은 산골로.


따져보니 내가 의정부와 부천, 인천에서 산 햇수가 12년이다. 마지막 살던 곳은 집에서 슬리퍼를 신고 CGV를 갈 수 있을 만큼 번화한 곳이었고, 횡단보도 몇 개만 건너면 갈 수 있는 대형마트가 근처에 2개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는 곳은 현관문만 열고 나가면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을 볼 수가 있고, 마당이든 데크든 돗자리만 펴면 캠핑장이 되고 펜션이 된다. 몇 년 전엔 데크에 누워서 10개도 넘는 별똥별이 지는 걸 세어보기도 했으니!


서울을 가고 싶었을 때의 이유도 별 것 아니었지만, 시골로 내려올 때의 이유도 단순했고, 단호했다. 거대한 흐름에 더 이상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함께 한 사람들과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버스는 하루 두 번 들어오고, 차를 타고 나가지 않으면 편의점도 작은 마트도 갈 수 없는 곳, 배달 음식이 오지 않는 곳에서 14년째 살고 있는 것이다. ENFP의 성격이기도 하고, 잦은 이사를 해야 했던 나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불편함은 대안을 찾으며 곧 적응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가끔 매캐한 서울 공기가 그립다. 신호등 하나 거치지 않고 20분 거리의 직장으로 출퇴근을 하다 보니, 다시 서울에 가서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은데, 교보문고 시그니처 디퓨저를 방향제로 선택한다. 뒷집 장로님 댁을 돌아 올라가면 바로 온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로 진입할 수 있는데, 색색의 불빛과 전구색 자동차 전조등이 끝도 없이 줄지어 반짝이는 서울의 야경을, 남산에서 굳이 보고 싶다.

 

우리 마을엔 서울 태생 시골쥐가 많다. 평화로운 전원생활이 졸리기 시작하면, 마음 맞는 시골쥐들이 상경을 노리며 머리를 맞댄다. 알을 낳으러 갈 것도 아닌데, 스케줄을 짜면서부터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공연, 전시, 수다, 맛집 탐방, 돌아오는 길엔 가벼운 쇼핑까지. 서울에서 꽉 찬 하루나 이틀을 채우고 내려오는 길은 배가 홀쭉해져도 늘 즐거웠다. 배를 빵빵하게 채웠던 서울에 대한 그리움을 다 배설하였으므로.


그리고 올해, 선물 같은 휴직생활을 하게 된 내가,

가장 먼저 가고 싶었던 곳은 당연히,

서울이었다.

그것도 평일에 혼자.


2부에 이어서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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