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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앤 Apr 16. 2024

서울 태생 시골 쥐의 서울 나들이 2.

새벽부터 황혼까지

이번 나의 서울 나들이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 관람,

둘째, 두산인문극장 제작발표회 참여.


둘 다, 올해 내가 휴직인 것을 아는 두 명의 후배가 각각 추천한 것들이다.

첫번째는 스스로 노는 것에 진심이라는 친한 후배가 도슨트 해설이 있는 평일, 스웨덴국립미술관 컬렉션을 추천해 주었다. 주로 주말을 이용해 여럿이서 미술관을 가서 도슨트를 만나긴 어려웠는데 평일이라 가능한 옵션을 권해준 것이다.


그보다 먼저는 지난 2월에,  또 다른 후배가 두산아트센터에서 하는 두산인문극장 에디터 활동에 지원해 보라고 권했다. 후기를 작성하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권리'를 주제로 한 다양한 공연, 전시, 강연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활동이었다.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휴직을 한 올해만 도전해 볼만한 일이라, 성심껏 에디터 활동 지원서를 썼는데, 운 좋게 선발이 되었다.


가능하면 한 번에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짰다. 그런데 정작 이 두 가지를 결정한 뒤 금산에서 서울 가는 버스 탑승 시간을 정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편을 마련하는 일이 꽤 어려웠다. 남편과 나는 서울여행 이틀 전 저녁, 최적의 일정을 짜느라 한참을 머리를 맞댔다.


당일 아침, 나를 인삼랜드에서 서울행 버스를 태워주기 위해 남편과 아들은 평소 출근, 등교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금쪽같은 아침 시간을 내어 서울 보낼 준비를 해주다니,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외조를 받나 황송했다.


가뿐하게 고속도로 휴게소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라탔고, 혼자 오늘의 일정을 머리에 그리며 마냥 설렜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 가서 평소 아침에 따뜻한 물을 1리터 정도 마시는 습관 때문에 나는 곤경에 처했다. 분명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왔음에도, 한 시간도 안 지나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바보. 누가 여행 가는 아침에는 물 한 모금도 제대로 안 마신다 해서 살짝 비웃어줬었는데, 나는 그날 아침 너무 방심했다. 뻔히 예상되는 변수도 그냥 패스해 버리는 이놈의 성격. '혹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가 아니라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무사안일의 사고방식이 가끔 날 이렇게 곤경에 빠뜨린다. 그런데도 잘 안 고쳐진다. 여하튼 버스 기사님께 차를 세워달라고 말할 만큼 사태가 심각해지지는 않아 감사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대치동의 마이아트뮤지엄을 찾아가는 것이 첫 미션이 되었다. 그동안은 서울에 오래 살았던 시골쥐들을 쫓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혼자 가려니, 세상에, 그것도 긴장이 된다. 지하철 타는 곳, 종점 방향, 내려야 하는 곳 등이 한 번에 머릿속에 입력이 안 되어 자꾸 핸드폰 지도를 쳐다보고 있는 내가 너무 웃겼다. 시골쥐의 서울 여행 티를 팍팍 낸다.


지하철 환승 구간을 걷는데, 거대한 사람들의 물결이 중앙선을 기준으로 오고 가는 모습에  놀랬다. 10시가 넘은 이 시간에도 이렇다니, 출퇴근 시간에는 얼마나 더 많을까, 상상해 보며 나도 인파 속에 떠밀리듯 걸어갔다.


8시 20분에 출발하는 차를 탔음에도 11시를 살짝 넘겨 미술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많이 늦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새벽부터 황혼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던 스웨덴 국립미술관 작품들 관람에 빠져들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상주의 풍의 19-20세기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친근하게 와닿았다. 조용조용하면서도 당시의 미술사와 화가들의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들려주는 도슨트의 설명을 듣다 보니, 아침에 그 난리를 치고 왔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거닐고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서 수련 연작을 하염없이 넋 놓고 바라보고 앉아있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다. 북유럽의 화가들 역시, 프랑스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성화와 영웅화에서 벗어나 당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빛과 함께 터치해 그려낸 그림들이 따뜻했다.


특히 인상적인 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안나 보베르크라는 화가가 그린 노르웨이 북부지방의 모습이었다.  그냥 보았으면, 그저 북극의 얼음산을 그린 건가 했을 텐데,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참 달라 보인다.

남편과 함께 북극으로 여행을 갔던 안나는 로포텐의 황홀한  풍경에 매료되어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방한 용품도 변변치 않았을 그 시절, 그 추위에서 야외스케치를 하는 그녀를 위해, 건축가인 남편은 그곳에 집을 지어 주어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해 주었다. 그런 전폭적인 지원과 격려를 받으며 완성한 그림이란다. 여자에겐 화가라는 직업을  제대로 인정도 안 해주던 그 시대에, 그렇게 깨인 남편이 있었다니, 멋졌다. 대작은 항상 상식과 관습을 넘어서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딱 50분의 해설이 끝나고, 입구부터 다시 그림들을 감상했다. '잘 그린다'는 의미는 이제 더 이상 실물과 똑같이 그린다는 뜻이 아니다. 스쳐 지나가면 그저 그랬을 일상을 화가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의 느낌으로 터치하며 캔버스에 담으면 작품이 된다. 200년이 지난 후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말을 거는 예술이 된다.  더 있고 싶었는데, 서둘러 나와야 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2시 두산아트센터 제작발표회에 가기 전에 점심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념품 샵에서 아침 정원의 작품이 그려진 작은 거울을 사는 걸 패스하진 않았다. 미술관을 가면 꼭 작은 손거울을 기념품으로 사는 게 나만의 루틴이다.   


우리 마을의 시골쥐들은 서울에 가면 절대 한식을 먹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한 번도 못 먹어본 외국 음식점엘 가거나, 핫한 곳으로 주목받는 식당을 심사숙고해서 골라 예약하고 가곤 했다. 그런데, 나 혼자 가니 그게 안 됐다. 결국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먹기로 했다. 크아, 우리 마을 시골쥐들이 알았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ㅎㅎ


오전에만 온다던 비가 12시가 넘도록 내렸다. 또 한 번 '설마, 그때까지 오겠어?'하고  안 가져온 우산 때문에 빗길을 걸어야만 했지만, 서울 노점들이 길게 내려놓은 차양들 밑으로 요리조리 뛰어들어 비를 피해 식당에 도착했다.


나름 검색해서 찾은 식당, 식사 시간이 살짝 지나서였을까? 아무도 없는 그 곳에 전세를 내고 혼자 앉았다. 인삼 잔뿌리도 하나 없이 마늘만 드글드글하는 9천 원 하는 반계탕에 적잖이 실망했지만, 비에 젖어 살짝 추웠던 날씨라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2시 제작발표회에는 늦지 않게 잘 도착했다.

이번 제작발표회는 필수 참여도 아니었는데, 나는 인문극장이라는 전체 기획과 공연, 전시 감독들의 제작 의도를 들어볼 수 있는 이 행사가 흥미로웠다. 2시가 되자, 사회자가 입장하고, 작품의 감독들, 작가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객석에서 질문하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손을 들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작은 신문사의 기자들이다. 그네들과 같은 자리에서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 있자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에디터 활동 연습하는 셈 치고, 나는 가져간 블루투스 키보드를 꺼내 중요한 것을 메모해 보며 집중해서 들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내겐 너무 특별한 경험이었다.


요즘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이직을 하는 것을 오히려  스펙으로 여긴다는데, 가끔 다양한 직장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겸업금지의 공무원으로 어쩌면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때론 지루한 일인 것도 같다. 내 평생 알바라고는 과외 빼고는 30년 전에 배스킨라빈스에서 일한 것이 유일무이하니까 말이다. 좀 더 어릴 때 배낭여행도 다녀보고, 여러 알바도 해볼걸... 이제 아무 곳에서나 잠도 못 자고, 손목 힘이 빠져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는 나이가 되어보니 못해본 것들이 후회로 밀려온다. 그런데, 그날의 경험은 참 색달랐다.


앞으로 '권리'를 주제로 한 다양한 공연, 전시, 강연들을 체험하고 나누는 에디터 활동에 열심을 내보리라!


돌아오는 길 고터 지하상가에서 쇼핑할 시간도 잠깐 계산해 두었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어리바리 출구를 찾으며 긴장하느라 여유 있게 둘러볼 시간은 되지 않았다. 한 켤레당 천 원은 싸게 살 수 있었던 니삭스 네 켤레를 검정 비닐봉지에 만족스럽게 담고 돌아오는 버스에 지친 몸을 실었다.


하루 당일 서울 여행이 뭐라고 이렇게 지쳤단 말인가? 그런데 몸과 다르게 마음은 뿌듯하다. 일어난 시간까지 포함해 보니 전시회 제목처럼 그야말로 '새벽부터 황혼까지'의 일정이었다. 내겐 참 특별했던 하루의 생각과 느낌을 나중에 되짚기 싫어서 버스 안에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꺼내 제작발표회 후기를 작성하고 마무리했다. 인삼랜드 휴게소로 도착하기 전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던가?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주기적으로 서울이 그리운 나는 새벽부터 황혼까지 그렇게 모든 그리움과 지적 허영을 배설하고 인적 드문 산골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엔 서울 동생네서 1박을 하는 일정으로 좀 더 길게 좀 더 여유 있게 다녀와야지.


아침이면 이슬에 젖은 솔잎향이 코를 간지럽히고, 산새들이 작은 목소리로 정답게 아침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그리운 서울 쥐들이 있다면 흔쾌히 반겨줄 것이다. 시간이 잠깐 멈추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 느릿해지는 산골 우리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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