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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앤 Apr 19. 2024

꽃비 내리는 날엔 트렁크에 돗자리를 넣어요

돗자리 주인에게 바치는 글

"언니, 꽃비 맞으러 같이 가실래요?"

그날따라 아침부터 수영, 수영팀 회식, 시민대학 첫 수업까지 일정이 빼곡했던 날로, 집에 도착해서 막 크로스로 맨 핸드백을 책상에 내려놓는 참이었다.

"언니, 용담댐 너머 벚꽃 많은 곳 있잖아요, 주말에 벚꽃 많이 폈을 때 갔었는데, 오늘은 꽃비 엄청 떨어질 것 같아요."

후배는 다섯 시가 넘었으니 분명 퇴근하고 오는 시간일 텐데, 꽃비 맞으러 갈 생각에 텐션이 이미 흩날리는 꽃잎처럼 가볍다. 살짝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 어쩌면 올해 이게 마지막일지 몰라'

라는 생각에  나는 흔쾌히 콜을 외치며, 마을로 들어오는 큰 길까지 차를 타고 내려가 기다리고 있는 후배 차에 올라탔다.

올해는 유난히 벚꽃을 오래 본 해다. 이제 더 이상 4월의 벚꽃은 못 볼지도 모른다는 작년의 뉴스를 비웃 듯 3월이 다 가도록 벚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른 벚꽃 축제를 계획했던 지역 관청은 연기 뉴스를 보도하기도 했고, 벚꽃 없는 개나리만 무성한 봄꽃 축제를 강행하기도 했다. 봄에 이렇게도 비가 많이 왔던가, 하루 따뜻했다가 며칠 봄비가 멈추질 않는 날씨가 몇 번 반복되자 우리 막내는 결국 감기에, 축농증을 거쳐 급기야 중이염으로 2주 가까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다시 니트를 꺼내 입어야 하는 비 오는 봄기운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또 정원에 심은 장미의 뿌리가 잘 안착하겠다 싶던 날씨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오락가락하던 봄비가 거짓말처럼 멈추자, 전국의 벚꽃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봄의 단골 불청객, 미세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하늘 배경으로 새색시 연지처럼 수줍게 붉어진 벚꽃들이 여기 저기서 흐드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올해 어느 해보다 벚꽃을 누렸다. 혼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날, 금산천 벚꽃길이 보이는 도서관 앞 카스토랑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고, 옆집 사는 부부랑 실개울을 넘나들며 벚꽃 그늘을 찾아 걷는 나들이도 했다.
그날 용담댐을 가기 하루 전엔 또 다른 후배의 제안으로 인적 드문 곳 꽃비 날리는 길을 운동 삼아 빠르게 30분 땀나도록 걸었다. 만개의 절정을 지난 벚꽃이 햇살 사이로 바람이 불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는 것까지 봤으니, 올해는 진짜 벚꽃을 제대로 즐겼다 생각했는데,
또 한 번의 콜이 온 것이다.

우리 마을은 금산군 남일면 중에서도 최남단, 오히려 전북 진안군이 가까운 마을이다. 덕분에 용담댐 주변의 생태공원호수 같이 아름다운 절경을 운 좋게 가까이서 즐긴다.
세상에, 금산에서 진안으로 넘어가는 모든 길이 벚꽃이다. 후배 차 안에는 벚꽃엔딩, 봄이 좋냐 등 벚꽃과 관련된 노래가 계속 이어졌다. 센스쟁이 같으니!
산 그늘이 없는 곳에 피었던 벚꽃은 이미 초록 잎이 돋아나고 있었고, 해가 좀 덜 든 곳의 벚꽃은 아직 남아 흩날렸다.
드디어! 넓은 주차장을 가지고 있는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범바우 공원'이다.

한쪽 가장자리엔 캠핑카 한 대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후배는 야심 차게 트렁크를 열며,

"언니, 저 돗자리 가져왔어요~"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와, 우리 누워있자~"

후배도  마치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우리는 초록색 올록볼록 돗자리를 주차장 아스팔트에 깔고 나란히 누웠다.

히야~. 벚꽃 구경은 수도 없이 해보았지만,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시가 아니니 사람들에 떠밀려 갈 만큼의 인파는 아니지만, 금산에서도 배경 속에 다른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고 사진을 찍는 것이 늘 쉬운 것은 아니었는데, 여긴 캠핑카 한 대 빼곤 우리뿐이었다.
하루 종일 봄 햇살을 온 지면으로 받은 아스팔트의 열기가 돗자리를 데워, 흡사 우리는 온돌방에 누운 듯 등이 따뜻했다. 옆을 돌아보니 이미 지면은 연분홍 융단이 깔렸다. 분홍 솜사탕 설탕같이 떼구르 구르는 꽃잎들이라니.


"우와~"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날이었지만, 느끼지 못할 만큼 작은 실바람에도 벚꽃은 후드득 날렸고, 후배랑 나는 바람의 지휘에 맞춰 합창이라도 하듯 탄성을 자아 냈다.

벚꽃만 보면 어릴 때 만화로 봤던 빨간 머리 앤의 마차가 떠오른다는 얘기, 넷플릭스에 방영된 빨간 머리 앤의 캐나다 그 섬(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엘 꼭 가보고 싶다는 얘기, 왜 다음 시리즈가 안 나오는지 모르겠단 얘기, 사람 없는 곳에서 이렇게 마음껏 벚꽃을 볼 수 있어서, 그런 곳에 살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얘기, 벚꽃은 여의도 보다 범바우공원이 낫다는 얘기, 이제는 다시 서울 가서 살라고 해도 못 살 것 같다는 얘기까지 ... 살랑대는 벚꽃들의 비행을 구경하며 끝도 없이 수다가 이어졌다.
내내 분주했던 하루의 일과 끝에 시간이 멈춘 듯 쉼표 같은 시간이었다.

데리러 와달라는 막내의 전화만 아니었음 언제까지고 있고 싶었다.  무성한 벚꽃 가지 사이로 서서히 해가 넘어가는 풍경까지 감상하며 일어나려는데, 이런~ 입고 있던 치마와 벗어 놓은 신발 속에도 꽃비가 내려앉아 있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고, 털어내기도 아까운 꽃비였다.

이 세상 어떤 그림이 이보다 아름다울까?
이 세상 어떤  영화가 이보다 감동일까?
한 점 아름다운 그림을 본 듯, 한 편 감동적인 영화를 본 듯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언제 만날지 모를 설레는 순간을 위해 내 차 트렁크에도 봄에는 꼭 돗자리를 넣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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