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아~"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는다는 열네 살 나에게 그토록 낭만적인 별명을 지어준 그녀. 나의 무엇이 시인과 닮았는지는 몰랐으나, 둥근 얼굴 덕에 불렸던 몽돌, 보름달 등 그때껏 누군가 붙여준 그 어떤 별명보다 맘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특유의 4차원적인 감성은 그 로맨틱한 별명 앞에, '원'이라는 성을 갖다 붙였다. 온 세상을 시로 노래할 것 같았던 나는, 하루아침에 밀림 속에나 등장할 법한 원시인이 되었다. 원 작명자에게 항의도 못하고 씩씩대는 나를 보고 깔깔거리고 웃는 그녀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그녀에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럼, 너는 만인이라고 해야겠다, 야만인~! 만인아~"
그렇게 원시인과 야만인은 탄생했고, 우리는 중학시절 질풍노도의 사춘기 밀림 속을 우리들만의 원시적이고 야만스러운 스타일로 헤쳐나갔다.
만인이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독서캠프에서였다. 다른 학교에서 온 만인이는 언뜻 봐도 눈에 띌 만큼 예쁜 아이였다. - 그런 그 아이가 집에서 불리는 이름이 '못난이'였다니. 너무 예뻐서 귀신이 샘낼까 봐 오히려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던데, 여하튼 샘은 귀신만 낸 게 아니라 처음 본 나도 났을 만큼 만인이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또 그걸 알아보는 우리 학교 장난꾸러기 남자애가 만인이에게 짖꿎은 장난을 쳤고, 정의의 여전사를 자처했던 내가 나서 그 사태를 해결해 주면서 그녀와 나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2학기가 되었을 때, 5개 반 중 우리 반으로 만인이가 전학을 오게 되었고,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둘도 없는 친구. 내게는 그랬다.
만인이는 남학생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던 오락실에 나를 데려가주어 '갤러그'와 '너구리', '슈퍼 마리오'에 입문시켜 주었다. 또 만화방은 주일 오전 예배와 오후 예배 전까지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좋은 곳임을 알게 해 주었다. 찰떡 아이스바를 사서, 하나씩 나눠 먹으며 이미라의 "늘 푸른 나무", "늘 푸른 이야기"를 번갈아 읽으며, 나도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푸르매"라고 이름 지을 것이라며 만화주인공에 대한 팬심을 결의로 다지기도 했다. 만화책에는 종종 배꼽 잡고 웃게 만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만인이는 그렇게 웃다가 결국엔 꼭 눈까지 빨개져서는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그런 만인이가 좋았다.
우리는 주말에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져, 만인이의 제안으로 주일 아침 교회를 가기 전에 목욕탕을 같이 다녔다. 새벽 6시면 집을 나와 목욕탕 앞에서 만나 같이 때 밀고 등 밀고 만인이네 집에 가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도 우리 사이를 시샘했다. 주일이면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나 들어온다고 혼을 내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동물원 노래가 좋은 줄 알게 된 것도, 김광석을 좋아하게 된 것도 모두 만인이 덕분이다.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너를 다시 만났었지~ "로 시작한 노래가 "언제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엔, 빛나는 열매를 보여 준다했지~" 클라이막스로 진입하는 구간에 이르면 주위에 사람이 있든 없든 서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건지 노래를 부르는 건지 여하튼 그렇게 외쳐댔다. 만인인가 좋다고 하는 건 나도 모두 좋았고, 관심이 생겼다.
우리는 장난처럼 네버엔딩 꼬리 잡는 말싸움도 지칠 때까지 종종 했는데 한 날은, 읽지도 않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에서 '참을 수 없는'이 꾸미는 말이 '존재'인지, '가벼움'인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 후 만인이는 책을 읽은 누군가에게 찾아가 확인했다며 '참을 수 없는'이 꾸미는 말은 '가벼움'이라고, 내가 이겼다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해 주었다.
만인이는 내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만인이네 집에 가면 작은 요구르트 4개를 큰 주스컵에 한 번에 부어 쟁반에 정성스레 올려 내왔다. 요구르트 한 개도 그때는 컸던 시절이었는데, 만인이는 그랬다. 기타를 칠 줄 알았던 만인이는 내게 기타를 가르쳐주며 기타를 몇 주 빌려주기까지 했다.
우정 목걸이까지 나누어 찬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사람은 없었다. 나는 만인이 같고, 만인이는 또 나 같았다. 우리는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고, 취미와 여가를 함께 했다. 부모님과 삐그덕 그렸던 십 대의 갈등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고민도 수십 통의 편지로 나눴다. 입 속에 넣어 먹고 있던 사탕도 씹던 껌도 얼마든지 나눠주고 달라고 말할 수 있는 못 말리는 원시인과 야만인이었다. 부모 형제보다 친구가 더 좋다는 그 시절에, 원시인에게는 야만인이 야만인에겐 원시인이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서로 다른 곳으로 간 바람에 못 보고 산 시간이 상당이 길어졌지만, 내 마음속에 만인이가 차지하는 고유한 영역은 줄어들지도 누군가 침범할 수도 없었다. 직장인이 되어 내가 의정부에 살던 시절, 만인이가 안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몇 번을 만나기도 했다. 결혼 후에 사는 곳이 바뀌어 이사를 가고 아이를 낳고 육아에 정신을 뺏겨 사는 동안 또다시 연락이 뜸하게 되었다. 내가 금산으로 내려오고 세 아이들 모두 떼 놓고 놀러 다닐 수 있을 때쯤, 서울 사는 다른 친구들이 만인이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인이가 이혼했단 얘기도 조심스레... 다음에 만날 땐 나도 꼭 불러달란 얘기를 했고, 어렵게 다시 약속이 성사되었지만, 그날 만인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까지 올라간 나는 많이 아쉬웠다.
며칠 후, 나는 만인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날 못 봐서 너무 아쉬웠다고. 시간 되면 꼭 둘이서라도 다시 만나자고.
그런데...
만인이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왔다.
자기도 보고 싶기는 한데, 나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나를 만나면 지난날 자신의 빛나던 시절이 떠올라 괴로울 것 같다고.
......
행간과 자간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도 도통 알 수가 없다. 내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롭다니. 아니 왜? 다른 친구들은 괜찮은데, 나는 왜? 내가 뭘 잘못 해서?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내 존재 자체가 문제인가? 더 이상 어떻게 물어야 할지, 뭐라 말해야 할지 적당한 댓글을 쓰지 못한 채 한동안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는 멍했고 마음은 휑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내 마음속 둘도 없는 친구였던 만인이가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기는 했어도 언제라도 만나면 그때만큼 반갑고 격의 없을 만인이가 손절을 선언한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을 때 늘 떠올리던 원시인의 만인이가! 어떻게 끝인사를 건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것 다 비슷한데...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름의 풍파와 사정없는 사람 있을까, 안 꺼내놔서 그렇지 말하기 시작하면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내가 뭘 모르는 걸까? 그녀가 어려움을 겪는 시절 어떤 도움도 위로도 되지 못한 내가 멀어진 느낌이었을까? 나는 좋은 시절만 함께했던 친구였을까?
그래도 나는 네가 보고 싶다고, 내 마음속엔 늘 네 자리가 있다고 한 번 더 말해주었어야 했을까? 만인이가 원하는 대로 나는 그냥 멀리 있어주는 것으로 그녀가 괴롭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일까?
그날 이후로 10년째 어떤 연락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쓸까 생각하며 첫 문장을 꺼냈다가 2주 가까이 체한 듯 뱉어내지 못해 글이 막혔다. 글을 쓰는 동안 무언가 깨닫게 되거나, 정리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나는,
모르겠고 모르겠다.
만인이의 카톡 프로필엔 늘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이 배경으로 있다. 이제 그녀는 교회가 아니라 성당을 다닌다. 사진 속의 그들을 물끄러미 부러운 듯 쳐다보는 시샘 가득한 내 시선을 의식한다.
'좋겠다...'
원시인은 그렇게 야만인을 잃었다.
야만인이 그리운 원시인 이야기는 이렇게... 새드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