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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앤 May 17. 2024

ENFP의 탄생

나는 이렇게 내가 되었다.

푸른 바다, 개울 품은 산, 양지바른 들판.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나의 놀이터는 바로 대자연이다. 내가 지금 노는 스케일이 크다면 그건 산과 들과 바다를 배경으로 놀았던 나의 어린 시절 탓일 테고, 이 세상이 신비롭고 재미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다소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도 그에 기인한 이유일 테다.


​서울을 떠나 울산과 부산을 거쳐 여섯 살쯤 살게 된 거제도는 해가 질 때까지 놀아도 놀 거리가 계속 나오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소꿉놀이 장난감이 없어도 산속 작은 개울에는 고춧가루 만드는 붉은 자갈이 늘 구르고 있었고, 김치 만들 풀들이 얼마든지 자라고 있었다. 손에 묻은 양념은 수돗가로 갈 필요도 없이 개울물에 좌우로 세게 흔들어 씻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겨울엔 들판에 군데군데 쌓인 볏짚단이 친환경 트램펄린이 되어주었다. 짚단 풀리지 않게 묶어둔 새끼줄을 타고 올라가 크게 점프 한 번 뛰면 대형 슬라이드가 따로 없었다.


“민경아~ 저녁 먹게 들어와~ 민경아~”


동네 다 떠나가도록 내 이름을 부르시는 엄마 목소리가 정확히 내 귓속에 꽂히면 내일 다시 만날 약속 따위 필요 없이 동네 친구들과 "안녕~" 한 마디의 짧은 작별 인사만 하면 됐다.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거기서 또 만날 테니. 장난감 기차에 과자와 설탕이 실렸다면, 내 머리와 바지 주머니엔 지푸라기와 흙모래가 가득했다.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온갖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해가 지도록 놀 거리를 찾고 만들어낸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은 성인이 되고 지금껏 반백의 나이가 가깝도록 내 영혼과 정서를 자라게 한 기름진 땅이 되어준 것 같다. 신이 창조한 이 세계는 그것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그저 배경에 불과하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면 놀라운 신비를 느끼게 준다. 덧붙여 먼저 발견한 이들의 지혜까지 배우게 된다면 그 기쁨과 즐거움은 배가 되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래서 배우는 것이 그 자체로 좋았고, 평생 배우고, 배우도록 돕기 위해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을 볼 때 최고의 짜릿한 희열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어릴 적 산과 들에 널려있던 돌멩이와 풀, 조개껍데기, 하다못해 버려진 유리병과 병뚜껑까지 어떻게 가지고 놀까, 그 쓸모와 활용을 고민하며 놀았다. 어느 날은, 유리병에 솔방울과 물을 채워 넣어 두었는데, 다음날 과실주처럼 변한 솔방울수를 보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이제는 내가 만나고 겪는 날 것의 재료들과 주제를 어떻게 조합하고, 엮고, 블렌딩할지 고민할 때, 놀잇감을 찾고 만들던 그때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주어진 것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의 놀이이자 즐거운 시도로 여겨진다. 잘 만들어진 놀잇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조금은 허술해도 주변에서 내가 직접 찾아다 만든 솔방울수가 훨씬 더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것을 배운 터다.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그렇게 두렵지 않다. 드러나는 결과 이상으로 과정의 경험치는 늘 에너지로 남아 그다음 도전을 수월하게 시작하도록 해주었으니까.


적응도 하나의 도전이었다. 잦은 이사로 초등학교만 세 번의 전학을 해야 했던 나는 가슴 아프게도 고향 친구를 손꼽을 수 없다. 대신 어느 곳에 가든 빨리 적응하고 변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손꼽힌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를 불편함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스릴이자 설렘으로 느낀다. 걱정과 떨리는 마음이 없지 않지만 생존을 위한 필살기를 은연중 배운 탓인 것 같다.


나는 학창 시절 내향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환경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 됐다. 내 얘기를, 내 생각과 감정을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어렵지 않게 나눌 수 있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보다는 오늘 처음 만난 지인이라는 믿음이 더 강하다. 넓게 보면 우리는 지구촌 한 가족이니까?! 전학을 가면 처음엔 얼굴도 이름도 거기서 거기 같이 헷갈리는 타인들이 결국 내 곁에서 각자의 개성을 지닌 친구들로 변해가는 것을 여러 번 배운 탓이고 그 믿음에 그리 배신 당하지 않은 이유였던 것 같다.  


​휴식시간에 트램펄린 위에서 책과 사과를 들고 폴짝폴짝 뛰고 있다는 에니어그램 7번 유형이자  MBTI ENFP인 나는 이렇게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호기심 많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창조하는 것을 놀이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나다.


물론, 오래 가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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