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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앤 Mar 29. 2024

그래서, 아직은, 차라리

사랑하지 말아라!

또 뒤집어 벗었다. 또 안 했다.

100번이고 1000번이고 더 한 말, "제발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마!", "양치했어?"

막내가 스스로 씻고, 옷을 입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한 말이니, 초등학교 시절 내내 만 6년에, 이제 한 달이 더해져 간다.

아침에 학교를 간 뒤 방에 들어가 보면 어제 벗어 놓은 교복 무더기에 깔려 보이지 않았던 뒤집어 놓은 양말이 널부러져 있다. 완벽하게 뒤집어서, 어김없이.


위로 일곱 살, 다섯 살 차이가 나는 형 둘에 비해, 어른들 말로 참 '말을 안 타는' 아이였다. 양말을 제대로 벗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기 전과 등교 전 양치를 해야 하는 까닭에 대해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도 수없이 해 보고, 감정적으로 호소도 해 보았지만, 잔소리에 못 이겨 양말을 세탁기에 넣기 전에 뒤집는 한은 있어도, 절대 '바르게' 벗는 법이 없었고, 열에 아홉은 시켜야 양치질을 했다. 샤워는 해도 양치는 안 하고 나올 정도니.


우리의 지난 6년은 별 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는 '잔소리 대마왕 엄마'와 별것도 아닌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못된 아들'의 대결이었다. 처음에는 타이르듯이 시작된 얘기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투의 눈빛과 말투를 보면 점점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그러다가 격정적으로 싸우는 일이 빈번해졌다. '대체 못 알아 듣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 작은 것조차 못해주는 것일까?' 서운했고, 가끔 정신이 드는 날에는 '이러지 말자', '그게 뭐라고' 하며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자책도 내려놓음도 늘 찰랑찰랑하는 인내의 한계선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수준이었으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어김없이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속으로 늘 못된 놈이라 생각하며 막내를 내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의 최고봉에 올려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어제 새벽성도가 각자의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할 때 얼마나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는지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ISTJ인 여동생이 자기가 입지도 않은 새 자켓을 내가 입고 출근했던 날 저녁, 거품을 물고 했던 말이 "언닌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기본과 상식의 수준은 그야말로 기본 이하, 기초적인 것이라 자부했는데, 그마저도 아들과 나 사이에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값이 아니므로 휘두르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김창옥 강사가 한 강연에서 그랬다. 안 먹히는 잔소리를 하는 엄마들은 옳은 얘기를 매우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일단 들으면 기분이 상하는데, 너 잘 되라고,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잔소리가 어떻게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바꾸겠냐는 다. 그러면서 "차라리 사랑하지 마세요. 대신 예의를 지켜주세요."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땐 또 그러겠노라 다짐했었는데....  여전히 나는 우리 막내가 어디 가서 미움받거나 흉 잡힐 일 없는 바른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스스로의 강박에 못 이기고 있었다. 그걸 모성이자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뒤집어진 양말을 보며 칼날 같은 눈빛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 굳건하게 세운 기본이자 상식의 칼날을 휘두르느라, 정작 아들의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방패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다는 느낌, 엄마는 적어도 내 편이었다는 기억, 존재만으로도 이미 특별하다는 자존감 등의 방패.


오늘 우연찮은 기회로 공주대 환경교육과 이재영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은 환경철학이라는 강좌를 수강하는 1학년 학생들에게 학기 초 도토리 세 개씩을 나눠주고 기말고사 때까지 키워 오라는 미션을 주신다고 하셨다. 이 미션은 매우 특별해서, 도토리를 죽이면 아무리 시험을 잘 봐도 F! 학생들에게 도토리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일절 가르쳐 주지 않고, 단 한 말씀만 하신댔다. 도토리를 심어 놓고 조바심에 절대 파보지 말라고. 학생들은 도토리를 키우는 방법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찾아내고, 세 개의 도토리에 '도리', '토리', '리리' 등의 이름을 붙여 애정을 쏟는가 하면, 걱정이 되어서 주말에 집에를 못 가는 부작용을 보이기도 했단다. 이렇게 싹이 나 키워온 도토리가 학기말에 학교 지정된 부지에 옮겨 심어져 자란 것이라며 어엿한 참나무 묘목의 숲을 보여주시는데, 일제히 감탄을 쏟아냈다.


교수님이 사범대 학생들에게 도토리를 키우는 과정에서 배웠으면 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셨다.

첫째, 좋은 교사는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나 내가 원하는 속도가 아니라는 것.

둘째, 다른 도토리와 비교하지 말라는 것, 각자 도토리의 속도가 있다는 것.

셋째, 반드시 도토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 물이 필요한지, 햇빛이 필요한지, 공부하지 않으면 도토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고 싶은 걸 주게 된다는 것이다.


아... 이걸 듣고 있는 내내 무언가가 가슴을 계속 치는 것 같았다. 세 가지 모두 막내와의 관계에서 답답한 내 마음에 창을 뚫어 문제의 본질을 보게했다.

막내의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공부한 적이 없어서, 필요한 것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 옳은 것, 주고 싶은 걸 주고자 했다. 왜 평균의 다른 아이들이랑 다르냐고 마음 속으로 늘 비교하고, 언제까지 이럴테냐고 한숨 쉬며 안달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정말 사랑을 모르는 엄마다.  마음대로 막무가내로 사랑하는 무면허자. 결국은 내가 알아차려야 끝나는 일이자, 내가 변해야 시작되는 일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식이 부모를 키운다 이럴 때 하는 말이었을까?


머리가 하얘질 쯤 교수님이 덧붙여 주신 박노해 시인의 <도토리 두 알> 이라는 시를 들으며 결국 울컥했다.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누가 봐도 번듯한 크고 윤이 나는 도토리로 키우려고 애쓰지 말자.

있는 그대로, 쭈글해도 도토리로 숲으로 던져져 결국 참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직은, 차라리 사랑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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