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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Jul 07. 2022

식식한 생활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반려식물

엄마 (68년생)

/ 내 손에 죽어나간 식물들... R.I.P. 암쏘리.


tv 채널을 돌리다가  <세상에 이런 일이>나 <tv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이 걸렸을 때 이런 에피소드가 나오면 끝까지 볼 때가 있다.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가 개나 고양이랑 서로 아끼고 보살펴주는 스토리. 그럴 때 등장하는 개나 고양이는 값비싼 품종은 아니지만 눈빛이 영민하고, 그럴 때 등장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몸이 굽거나 혼자 지내시면서도 손길이 따스하고 미소가 푸근하다. 그분들이 마디 굵은  손으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주름진 입술로 고양이의 작은 머리에 입 맞추는 장면이라도 나오면 괜히 눈물을 찔끔 찍어내곤 한다.


여행을     번씩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시장이다.  좋은 식재료를 고르는 안목이 까막눈이라 물건을 집어 드는 기준이랄  없는데, 가끔은 그냥 지나치기 힘든 물건을 만날 때가 있다.

할머니가 깐 좌판에서 자두나 살구 무더기에 초록 잎사귀 몇 장이 붙은 열매를 몇 알 섞어놓은 걸 발견했을 때.

옥수수는 껍질을 아예 다 까거나 아예 하나도 안 까서 파는 게 대부분인데 제일 안쪽 한 겹을 남겨서 탱글한 옥수수한테 시스루 셔츠 한 장을 이쁘게 입혀 가지런히 뉘어놓은 걸 발견했을 때.

안사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똑같은 걸 대형마트에서 발견하면 아무 감흥이 없지만 시장에선 다르다. 열심히 키운 걸 소중하고 이쁘게 다루는 투박한 손길이 짐작돼서 마음이 가는 거다. 마케팅 감각으로 훈련된 심미안이 아니라,  내 새끼들 이쁘게 해서 내보내겠다는 뜨끈한 마음.


동물이건 식물이건 서로 다른 종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을 돌보고 가꾸는 모습은 감동을 준다.


고백한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연쇄살식마였다. 식물을 죽여왔다는 얘기다. 누렇게 말라버린 화초를 버리면서 제발 묻지도 않고 화분을 선물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이렇게 살기등등하게 굴었건만 눈칫밥 먹으며 몇 년을 버티고 있는 화분을 볼 땐 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솔직히 좀 귀찮기도 했다.

그러다 작년 봄, 남편이 호접란이 가득 핀 화분을 얻어왔을 때도 짜증을 냈었다. 안 그래도 식물이 죽어나가는 판인데 까다로운 난을 데려오면 어떡하냐고. 그러면서도 꽃은 좋아해서 석 달 가까이 실컷 꽃을 즐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꽃잎이 힘을 잃더니 꽃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르는 척 외면하기는 뭐해서 물 주는 시늉만 하며 두어 달. 가을이 돼서 애들은 병색이 완연해졌다. 두툼하고 시퍼랬던 잎들이 쭈글쭈글 누렇게 변해버린 거다. 아 어쩌지. 꽃도 실컷 보여줬던 애들인데 너무 미안한 걸.  

결국 10월 어느 날쯤 야매로 수술실을 열었다. 호접란 화분을 꺼내본 거다. 그랬더니 세상에. 새카맣게 죽어가는 뿌리가 간신히 짤막하게 붙어있는 거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범인들은 범죄현장에 돌아가서 쾌감을 느낀다지만 난 쾌감 대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결단을 내렸다. 살려야 한다!

그때부터 생전 보지 않던 유튜브를 보며 식물 공부를 시작했고, ‘호접란만 생명이냐 우리도 생명이다’를 외치는 눈칫밥  화초들도 돌아보게 되었다. 공부를 하니 모든 식물이 직사광선 마니아는 아니란 걸 알게 되어 부랴부랴 햇볕을 조절해주었고, 아무 생각 없이 물을 콸콸 주었다간 집안이 뿌리째 흔들린다는 걸 배워 물 주기 체크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가습기를 틀고 선풍기를 돌려주고 식물들의 기색을 살폈다. 내가 낑낑대니 애들도 따라주었다. 처음엔 중환자실처럼 무거운 분위기 더니 요즘 베란다에 나서면 초록초록 수다가 느껴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 베란다가 드라마틱하게 풍성해지진 않았다. 차분하지 않고 치밀하지 못한 성격 탓에 식물들 이름도 어려워서 못 외운다. 귀족적인 자태와 이국적인 분위기로 팬덤이 대단한 식물은 들여놓을 엄두도 못 낸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분위기 있고 근사한 식물 집사가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굳이 롤모델을 찾자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강아지랑 뺨을 비벼대던 주름진 할머니나 이쁜 이파리가 붙은 자두를 정성스럽게 쌓는 시장 할머니처럼 되고 싶다. 유기농 음식을 골라 먹이고 아이가 쓸 크레파스 하나를 고를 때도 중금속이 들어있는지 맘 카페를 찾아보는 엄마도 좋지만, 어두운 눈 때문에 가시를 놓칠까 싶어 갈치를 손으로 꾹꾹 눌러 확인해서 먹이고 두툼한 손으로 손녀의 얼굴을 썩썩 세수시키며 ‘으이그 내 새끼’를 외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 (우리 딸이 분발만 해준다면 실제로 그런 할머니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식물집사보다는 의리의 식물돌쇠가 되고 싶은 나는 이제 화분에 물 좀 주러 가.....기전!!! 이 글과 무관하게 끝으로 한마디. 영화 [헤어질 결심]. 두 번씩 봅시다. 깐느박에게 의리를! 소중한 영화에게 영광을!




딸 (97년생)

/ 나는야 좋은말 양파


어렸을 땐 식물들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니깐. 과학시간엔 식물도 생명이라 배웠는데 초등학생의 상상력으로는 눈코입도 없는 게 무슨 생명이라는 건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양파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양파가 잘 자라고 미워한다고 말해주면 못 자란다는 이른바 '좋은말 나쁜말 양파론'은 믿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정신으로(?) 미술 선생님의 붓으로도 담기지 않는 초록빛을 보며 저게 생명력이라는 건가 싶기도 했다.


식물이 살아있다는 걸 믿지 않던 초등학생은 식물과 소통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내 손으로 만들고 가꾸고 보살피는 일엔 재주가 없다. 손만 투박한가? 관찰력도 진득한 구석이 없어 섬세하지를 못한다. 식물이 지금 잠을 자는 건지 어제보다 기분이 좋은 건지 목이 마른 건지 구분을 못한다. 며칠 전엔 흰싸리나무를 가꾸는 엄마한테 "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어?"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걔 지금 쌩쌩한 거라 그랬다.


식물은 고요하다. 조용히 일어나 조용히 잠든다. 요란 법석한 인간 세계와는 다르다. 모양이 가늘어 보일지언정 쉽게 죽지도 않는다. 죽은 듯 보여도 죽은 게 아니다. 다 마른 애도 잘 묻어주고 가꿔주면 다시금 조용히 자기를 일으킨다.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들은 식물을 닮았다. 작년 이맘때쯤 오랜만에 간 할머니 댁 옥상이 온통 초록색이었다. 열무 배추 호박 방울토마토 대파 외 내가 모르는 245종의 식물. (체감상 수치다) 살면서 배추 뿌리 심어서 꽃까지 피운건 처음 봤다. 할머니는 원래 뭐든 키웠다 하면 무럭무럭 길러 꽃을 피운다. 인터넷 검색 한 번 없이 본인의 경험과 정성만으로 열매를 보신다. 산만한 나와 달리 할머니는 차분하고 꼼꼼해서 무엇이든 묵묵히, 끝까지 해내신다. 할머니의 옥상은 할머니가 가진 재능으로 가득 차있다. 그래서 그 10평 남짓한 초록색을 보고 있으면 조금 슬프기도 하다.


각설하고, 나는 이제 좋은 말 나쁜 말 양파론은 안 믿는다. 식물은 속세의 언어 따위에 좌지우지되는 생명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식물은 인간에게 말없이 소통하기를 가르친다. 관심법계의 권위자. 호된 선생님이라 조금만 실수하면 꼬르륵 말없이 등 돌리시는 게 문제긴 하지만.

나의 빈약한 관찰력, 생활 전반에 걸친 부주의함과 어수선함은 식선생의 가르침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조만간 스승님을 모셔야 하지 않을까? 기왕이면 변덕이 없는 분으로.

앗. 문득 플라스틱 다육이를 생화로 착각하고 열심히 보살폈던 모 선배가 생각난다. 해골물이든 플라시보든 해보는 게 중요한 거일 지도. 그러니 나의 지인이라면 슬쩍 조화를 선물해라. 모르는 척 열심히 키울 테니..


고양이와 식물은 분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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