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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Jul 28. 2022

별 거 없어도 좋아!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여름방학

엄마 (68년생)

/지금은 맨날 방학인데 왜..?


몇 년 전 영국에서, 최고의 어린 시절이 언제였는지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최고의 어린 시절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부모님과 시간을 충분히 보내야 하고, 학교 시험에 시달리지 말아야 하고, 친구들과 야외에서 논 시간이 충분해야 하고 등등. 그런데 그 조건 중에 제일 1순위에 꼽힌 건 미처 생각 못한 얘기였다.

바로, 길고 뜨거운 여름 (a long, hot summer).


여름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거기에 학교에서 해방되는 방학이 겹치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불만이 하나 있었다.

나만 없어, 시골 할머니 집.  

그 당시 어린이 영화나 만화를 보면 여름방학을 맞은 애들은 기다란 곤충채집망을 들고 시골 할머니 집에 내려가 (예전에 행복한 신혼생활을 그리는 장면의 클리셰가 장바구니에 삐죽 나온 대파와 바게트 빵이듯, 신나는 여름방학 묘사의 클리셰는 긴 막대기로 만든 곤충채집망이었다)  도랑에서 물고기도 잡고 (의기양양 들고 왔던 곤충채집망은 엇다 팽개치고!) 원두막에서 수박도 먹고,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서 잠자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나에겐 그 모든 것의 전제조건인 시골 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친가 외가 모두 서울에 사는 나의 혈통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중요한 전제조건이 없던 나의 여름 방학은 어땠나. 결국 별 거 없었다. 대체로 시시했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여름 방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선풍기 바람을 쐬며 읽던 만화책이다. 선풍기 바람에 펄럭대는 책장을 누르며 읽던 만화책은 왜 이리 재밌던지.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에 실리던 ‘오싹오싹 공포 특급 세기의 괴담’ 같은 여름 특집 기사는 어린이용 길티 플레저를 만끽하는 찬스이기도 했다.

여름방학의 두 번째 이미지는 샌들의 계절이었던 거. 나만 그랬는지 다들 그랬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 당시 맨발에 샌들을 신는 건 방학 때뿐이었다. 등교할 땐 양말을 신고 샌들을 신었으니까. 하지만 맨발에 샌들 차림으로 여름방학을 지내고 나면, 발등에 하얀 샌들 모양이 남았다. 거기 빼고 발등이 그을렸으니까. 그걸 보면 뿌듯해지곤 했다. 열심히 싸돌아다녔다는 만족감.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건 뜨거운 한낮 아무도 없던 골목이다. 아무리 심심하고 시간이 남아돌아도 절대 손대지 않던 방학숙제는 또다시 미뤄놓고 무작정 집을 나섰을 때 마주하던 풍경 말이다. 골목엔 1000퍼센트 농축 햇살이 들이부어져 있고, 매미 소리는 시끄러웠지만,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그 기묘한 순간. 더워서 집에서 다들 입 다물고 널브러져 있었나? 아무튼 그 숨 막히는 풍경은 여름방학이 남긴 불멸의 한 컷이다.


이렇게 꼽아놓고 보니 나의 여름방학은 정말 시시했다. 내세울 게 너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즐겁고 설레는 기억으로 남아있으니 신기할 지경이다. 학교에 안 간다는 이유만으로, 숙제를 내일로 미룰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tv에서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이나 여름 특선 외화를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좌고우면 할 거 없이 마냥 직진만 해도 도달할 수 있었던 참으로 낮은 문턱의 행복.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은 시시한 것들이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눈과 귀가 있었던 거 같다. 작가 루이스 캐럴도 그걸 알고 있었던 걸까. 그가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일 끝부분엔 이런 대목이 있다.


언니는 눈을 감고 앉아서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있다는 것을 반쯤은 믿었다. 하지만 눈만 뜨면 이 모든 것이 단조로운 현실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것은 바람 때문일 테고, 웅덩이가 물결을 일으킨 것은 갈대의 흔들림 때문일 터였다.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양들의 방울 소리로, 여왕의 고함 소리는 목동들의 외침으로 바뀔 터였다. (앨리스 언니가 알기로는) 아기의 재채기 소리, 그리펀이 외치는 소리, 그리고 그 밖의 별난 소리들은 모두 바쁜 농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로 바뀔 터였다. 가짜 거북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들의 울음소리로 바뀔 터였다.


이 대목의 화자는 앨리스의 언니다. 동생 앨리스는 모험에 뛰어들어 주인공이 됐지만, 언니는 차분한 목격자다. 그녀는 알고 있다. 눈을 감고 상상의 엔진을 걸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초라한 재료들을 신기한 모험담으로 탈바꿈시키는 마법이 가능하다는 걸.


쓰다 보니 문득 깨닫는다. 나도 한때는 그런 마법을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걸 홀라당 잊었다니. 아니 잊은 정도가 아니라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본 게 남의 나라 유적을 발견한 사람처럼 새삼스럽다니.

좋다.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잊는 거라 치고, 그럼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뭘까. 여름은 더 뜨거워지고 더 길어지는데 나는 왜 좀처럼 행복해지지 않는 걸까.


아 시시해. 여름방학처럼 신나는 얘기를 쓰자고 해놓고 결국 이렇게 질척대다니. 어린 시절 시시함은 빛나기도 했는데 이게 뭐람. 어른이란. 쳇!




딸 (97년생)

/...여름이었다


여름방학의 이미지는 허황된 감이 있다. 내리쬐는 땡볕, 무성한 풀숲. 그 사이를 가르고 다니는 아이들과 장대같은 잠자리채. 맴맴 매미소리와 채집통 속 퍼덕거리는 곤충들. 흙, 꽃, 물.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 아스팔트 위만 달린 지가 오래됐는데도 여름방학이라고 하면 엽서같은 풍경이 뇌리에 박힌다. 심지어 내가 겪지도 않았던 일들인데.


그렇다면 실제 여름방학은 어땠는가. 기억은 흐릿 하지만 감각은 직관적으로 남아있다. 방학은 좋아! 왜냐하면 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으니까! 집에서 엄마와 시시덕 거리며 옥수수를 먹든 친구네 놀러 가 친구의 어머니가 해주신 떡볶이를 먹고 티비를 보든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건 짜릿한 일이다. 특히 오전 11시무렵 어른들은 출근하고 한산한 아파트 단지를 누빌 때가 제일 좋았다. 어른 없는 세상에선 어린이가 일짱이다.


그치만 여름방학의 쾌락은 유독 짧아서, (실제로 한달도 안됐다) 정신 차리고 보면 밀린 일기를 써야만 했다. 머리 싸매고 있는 초등학생딸 옆에서 아빠는 신문지를 말고 엄마는 보라색 비닐백을 잘라 방학숙제용 재활용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완성된 인형은 누가 봐도 어른의 솜씨였지만 개학날 3학년 2반 사물함 위에 진열된 것 중 초등학생의 작품같은 인형은 한 개도 없으니 괜찮았다. 방학숙제의 목적에 의구심을 품게 되긴 하지만.


고등학생의 여름방학은 서늘하다. 하루 종일 에어컨이 돌아가는 학원과 독서실만 전전하니 땡볕뿐만  아니라 해를 볼 일이 없다. 그래도 방학은 방학이라고 손꼽아 기다리긴 했다. 공부를 떠나서 잠깐 숨 돌릴 수 있어서? 아니. 같은 반 학우들의 땀냄새에서 벗어나 숨을 쉴 수 있어서. 청소년 38명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교실의 에어컨과 선풍기. 앉아만 있어도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 공 쫓아 운동장을 달리는 남자애들. 걔네의 마르지 못한 체육복과 머리에 묻은 수돗가의 물비린내. 여느 순정만화도 알려주지 않은 리얼 K고등학생들의 냄새가 코를 찌를 때면 차라리 나인투나인 사교육을 꿈꾸게 된다.


방학은 도피다. 하루 종일 의자에 엉덩이 붙이는 일상, 친구랑 절교를 해도 다음날이면 옆 분단에 앉아야만 하는 가혹한 현실, 짝꿍의 땀냄새 혹은 교수님이 내주는 과제들로부터의 해방.


하루 종일 주어지는 자유시간은 즐겁고 기쁘지만 사람 마음은 또 간사해서, 어느 순간 질린다. 말로는 학교 가기 싫다고 해도 자꾸만 달력을 들여다본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친구들의 재활용 인형은 어떻게 생겼을지 보고 싶어서인지, 나랑 싸운 그 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건지. 이유야 뭐가 됐든 개학 전날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개학 이튿날부터 다시 방학했으면 좋겠다고 툴툴거리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개학을 제일 기다리는 건 학부모라는 것이 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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