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처벌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
법과 처벌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
학교 폭력을 줄이기 위해서 어떤 이는 처벌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절차를 개선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는 매해 새로운 방식으로 학교 폭력을 해결한다. 그 말은 전의 변화는 실패였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올해 바뀐 정책 역시 머지않아 다시 바뀔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나는 처벌을 강화하고, 절차를 개선하는 것은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이 ‘학교 폭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성숙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우선이다.
뻔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제도가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우선 ‘폭력’과 ‘학교 폭력’은 개념과 처리방식이 다르다. 폭력을 국어사전에 검색해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명사]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넓은 뜻으로는 무기로 억누르는 힘을 이르기도 한다.
폭력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물리적인 힘으로 인한 피해이다. 하지만 요즘은 ‘언어폭력’, ‘사이버폭력’ 등 폭력의 정의가 넓어지면서 폭력이 반드시 물리적인 힘에 의한 피해를 말하지는 않는다.
학교 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2조에 의하면 ‘학교 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ㆍ유인, 명예훼손ㆍ모욕, 공갈, 강요ㆍ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ㆍ폭력 정보 등에 의하여 신체ㆍ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어느 하나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그 경계선에 있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법에서 처벌받을 수준으로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처벌하기는 쉽겠지만, 학생들이 호소하는 ‘학교 폭력’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성인은 학생을 미성숙하며, 보호하고 교육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학생들 간에 일어나는 갈등과 폭력을 성인의 경우보다 민감하게 대응한다. 예를 들어 ‘꼽을 주는 행위’ 같은 것으로 경찰서에 신고하는 성인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주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학생을 상대하면서 느낀 나의 개인적인 생각 이렇다. 갈등이나 충돌, 차별적 요소 같은 것을 살면서 아예 못 느끼게 하거나 그런 과정을 원천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도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완전히 교감하고 소통하는 성숙한 사회가 어딘가에는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미성숙하여 늘 갈등이 존재한다. 실수를 거듭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기도 한다. 내가 아무리 잘하여도 일이 꼬일 때도 있으며, 나와는 절대 맞지 않는 타인을 만나기도 한다.
특히나 지금의 학생들은 현재의 성인보다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져 있다. 예전에는 명절이나 제사 같은 가족 행사에 많은 친척이 모여 북적북적했다. 조부모님, 삼촌, 숙모, 사촌들로 집안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이 있었지만, 이제는 간소해졌다. 그리고 학교 수는 늘어나고, 자녀 수는 감소함에 따라 한 반에 있는 인원수 역시 축소되었다.
현재 우리 학교 기준으로는 28명이 1학급이며 남녀공학이므로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누면 그 절반이 될 것이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는 여학생으로만 40명이 넘는 인원이 한 반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원수가 줄어드니 학생들이 친구를 선택할 선택지는 더 줄어들었다. 그러니 특정 그룹에서 배척당하면 다른 그룹에 들어가기도 더욱 어렵다. 이런 환경일수록 자신과 다른 타인을 수용하는 역량이 필요하지만, 반대로 그 능력은 이전보다 떨어진다.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아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모른다. 가정 공동체의 어른들은 아이가 잘못하거나 부족해도 이해해 주고, 일부러 져주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
그러나 학생 간의 사이는 냉정하다. 매력적인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의 구별이 확실하다. 학생은 서로를 비교하며 선택하고, 선택당한다.
물론 학교에서는 도덕적이고, 교육적으로 부족한 친구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도움을 주는 것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다르다. 도움을 주는 것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고 우정은 둘 사이가 동등해야지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릴수록 자신보다 부족한 존재를 도와주는 것도 잘하지 못한다.
인간관계의 폭은 좁지만, 서로 간의 소통의 양은 이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하교하고 집에 돌아가면, 집에서는 가족과 함께하거나 혼자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뉴스를 볼 때면 내가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을 못 봐서 입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같이 TV를 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외에는 주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는 아주 간혹가다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만화책을 읽거나, 공상에 빠지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과장되게 말하면 24시간 친구들과 밀착해 이야기하고 있다. 중학생들의 인스타그램 단톡방 등을 보면 쓸데없는 짤이나 초성으로만 이루어진 자잘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 속도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며 잠깐만 주위를 돌려도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없다.
성인인 우리가 보았을 때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지만 아이들은(특히 여학생)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를 그룹의 누군가가 나누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또 대화가 아니더라도 친구들이 올린 피드를 보면서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소통의 한 종류이다. SNS의 발달로 인간은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양이 늘었다.
학생들이 단톡방이나 SNS에 하는 기록들은 사실 이전 세대가 하는 ‘친구와의 수다’의 연장선이다. 그렇기에 이런 대화는 문법에 자유로우며, 비속어를 많이 쓰고, 불필요한 반응이나 대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학생들은 자유롭고 허용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대화를 그다지 검열하지 않고 바로바로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소통은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쌍방향인 듯 일방향 같은 정신없는 소통이다. 쉴 틈 없이 오가는 잡다한 말 중에 몇몇은 아슬아슬한 수위의 말도 있고, 험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격 소통’은 문자로 일어나기에 미묘한 어투로 인해 오해가 생기기 쉬우며, 음성 언어와 다르게 휘발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웃으며 넘어가는 사소한 표현도 곱씹어 보면 기분이 나쁠 수가 있고, 누군가는 나의 기록을 캡처해 저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학생 시절에는 성인보다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며 자신을 강하게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런 허세들이 갈등을 심화한다. 자존심을 세울 일이 아닌데도 학생들은 자신의 ‘가오’를 살리기 위해 문제를 키운다.
오해가 생기기 쉬운 환경,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남아있는 나의 기록들, 그리고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과도한 의사소통 행위는 결국 이전보다 더한 인간관계 상의 갈등과 피로감을 일으킨다. 그리고 학생 동안에는 이러한 갈등이 학교 폭력이라는 기준에 따라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을 모두 ‘학교 폭력’이라고 규정하여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 학폭위의 결정으로 이런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는 있지만, 처벌이 해결은 아니다.
왜냐하면 학교 폭력의 진정한 해결이란 관계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회복이란 단순히 관련 학생들이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는 것 이상을 말한다. 즉, 관계 맺기에서 미숙한 학생들이 제대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학폭위는 그저 처벌에만 그치고 있다.
학교 폭력을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도록 엄청난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처벌을 강화하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나의 자녀를 지키고자 하는 부모의 보호 의식도 강해져 불필요한 신고와 법정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아이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국 어른들의 문제가 되고, 정작 아이들은 그 문제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처분만 기다리는 꼴이 된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피해를 공감받으며, 사과하고, 사과를 수용하는 일련의 과정은 거기에 없다.
가해자는 취업이나 진학에 불이익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가해자의 반성을 일으킬까?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은 그 학생이 받는 벌로 순간 해소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볼드 처리한 부분은 각주표시입니다.
각주 20) 그래서 그런 채팅방이나 SNS의 표현으로 그 학생을 경솔하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각주 21) ‘체면’, ‘자존심’, ‘멋’이라는 비속어. 얼굴을 뜻하는 일본어 ‘가오’(顔, かお)에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