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서로 사과하면 안 될까?
그냥 서로 사과하면 안 될까?
예전에 근무한 학교에서 학교 대표로 민주시민 교육 연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들었다. ‘혁신학교의 학생들이 더 민주시민의식이 높을까?’에 관한 연구였는데 결과는 혁신학교라고 해서 민주시민의식이 더 높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시민의식이 가장 높은 학생들은 불합리한 교사가 담임인 학급의 아이들이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의외라서 내가 이 결과에 대해 질문까지 했었다) 근데 연구자인 선생님도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교사가 불합리할수록 학생들의 민주시민 의식이 높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민주적인 사고’가 꼭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비민주적인 환경 아래서 민주적인 과정에 대한 열망이 더 커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높은 시민의식을 가진 것도 비민주적인 정치 환경의 반작용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민주적 환경이 민주시민의식 형성한다.’라는 것은 교육학과 정치사회학에서 기본 전제로 여겨져 왔다. 민주주의는 학습되고 경험되는 것이라는 신념 아래, 학생 자치, 수평적 의사소통, 토론 중심 수업, 공동체 참여 등의 민주적 환경이 참여, 책임, 타인 존중, 비판적 사고 같은 민주시민 의식을 자연스럽게 길러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존 듀이(John Dewey),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같은 교육철학자들도 “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살아보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라고 하며 민주적 환경을 강조했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말에 무관심하거나, 형식적으로 여기는 모습도 적지 않다. ‘억압된 경험’을 겪은 세대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러나 지금의 학생들은 문제의식 없이 주어진 상태로 민주주의를 접했기에 소중함을 체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예전의 학교는 교사의 독단적인 판단과 ‘치맛바람’이라고 불리는 몇몇 학부모의 의견에 따라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했다. 다수의 학부모는 생업을 하느라 바빴고, 자녀의 교육을 학교에 일임했다. 그리고 학교를 신뢰한 만큼 그것에 무심했다.
인터넷도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다소의 불공정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묻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남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무수한 ‘카더라’ 통신 속에서 학교에 대한 불신은 쌓였다.
지금은 학교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에서 과거보다 민주적 절차가 보편화되었다. 학교의 문턱도 낮아졌고, 교사와 학생의 관계,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도 이전에 비해 대등해졌다.
이런 민주적 절차가 보편화된 만큼 우리의 민주시민 의식도 키워졌을까?
안타깝게도 절차나 제도의 보급을 우리의 인식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다.
학생은 학교 폭력 예방 교육을 통해 걸리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낸다. 그리고 학교 폭력 해결을 위한 민주적 절차에 대한 지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것에 힘쓸 뿐, 내가 절차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학교 폭력 사안 처리에 있어서 학교가 조사하는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든지, 즉시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든지, 비밀 유지가 되지 않았다든지 같은 절차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항의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불리한 절차는 지키려고 하지 않으며, 사안 처리에 지체되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이는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생기고 몇 번의 개정을 거치며 학교 폭력의 해결 과정은 점점 재판처럼 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는 것을 대단히 공정하고 적합한 고차원적인 원리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검사 김웅은 그의 책 『검사내전(2018)』에서 “법대로 하자는 것은 상대방과의 공존과 상생은 개뿔, ‘널 반드시 박멸시키겠다’라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이라 했다. 또, 법에 따른 분쟁 해결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기보다는 새로운 분쟁과 갈등을 낳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법대로 하자’는 말은 매우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도발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법이라는 것이 완전무결하지는 않다는 것은 재판이나 법률에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알 것이다. 우리는 재판을 통해 혐의가 있는 사람이 당당히 그 혐의를 벗어나는 장면도 보았고, 피해자의 고통이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도 보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법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합의하여 결정한 조정보다 더 상위의, 고급의 해결 방법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리고 법의 처벌을 받으면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도 치유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내가 피해자가 되면 법의 처벌로 나의 상처와 고통이 다 치유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직접 그 ‘법대로’ 무언가를 처리해 보지 않으면 말이다. 그렇기에 법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최후의 방법으로써 활용되어야 한다.
학교 폭력을 처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든 예처럼, 그 과정은 지루하고 복잡하며 냉정하다. 피해를 당한 측은 나의 피해가 확실하기에 자기 뜻처럼 일이 빠르고 신속하게, 자기 위주로 처리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다.
학교 폭력에 대한 처벌이 나올 때까지는 양측 모두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피해자의 불만은 쌓여간다. 그 사이 피해자는 절차적 처벌 외에도 학교가 심리적·정서적 보호와 위로를 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다. 가·피해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이상 섣불리 학교에서 어떤 조치를 결정하기 힘들다.
「학교 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초기나 그 이전에는 학교 폭력 해결의 중심은 담임교사였다. 담임이 조사해서 학생부에 넘기면 학생부에서 다시 사안을 조사하고, 학생부에서 무언가 결정하면 그것을 다시 담임교사가 학부모님께 전달했다. 학생 조사나 학부모님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담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담임교사가 학폭의 여부, 처벌의 수위를 정할 권한은 없었기에 결국 학생은 담임 교사와 담당 부서 교사를 번갈아 가며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복잡한 의사전달 과정은 학부모와 학생, 학교 간의 의사소통에서 오해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비밀 유지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학교 폭력 전담 교원이 생기고, 이 교원과 당사자, 그 학부모님, 그리고 관리자(교장, 교감)만이 이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절차에 대해 잘 인지한 학부모님은 학교 폭력 전담 교원과 소통하며 일을 처리해 나간다. 그러나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담임교사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학교가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자기와 자기 아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동안 교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렇게 태평하다니, 분한 감정이 든다. 그 감정이 합리적이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섭섭함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법대로’, ‘절차대로’ 진행하기 위해서 학교는 신중해야 하고, 관련 학생들과 거리를 두며 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 과정 동안 관련 학생과 학부모는 그 시간을 홀로 이겨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 폭력 사안을 재판처럼 생각해 대입해 보자. 교사는 그럼 판사인가, 검사인가, 변호사인가? 법률상에서는 교사를 ‘검사’나 ‘판사’처럼 대한다. 교사는 학생을 감시하고, 학생의 잘못을 고발할 의무가 있으며, 학생의 잘못을 벌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학교 폭력 사안이 일어났을 때 학생을 대하는 방법은 교사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담임한 학생이 다소 잘못 했더라고(심지어 가해 학생인 것 같더라도!), 담임교사로서는 따뜻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잘못한 학생을 두둔하는 꼴이 될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그 잘못 때문에 학생이 미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사는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는 존재이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교사가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교사의 선에서 지도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일에는 따끔한 훈계와 충고, 질책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안이 커 교사의 판단을 벗어난 일이 생겼을 때는 그래도 학생의 편에서 학생을 일정 부분 보호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잘못한 학생을 무조건 적으로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보다는 학폭위의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마지막까지 학생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하고, 포용하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학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교사 자신의 안전을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학급 교체나 강제 전학 같은 학폭 처분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학생은 학급에 남아, 학급의 일원으로서, 학교 학생의 일원으로서 생활하게 된다. 학생과 학부모의 마음에 학교가 학생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억울함이 남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 피해를 주려 한다거나, 담임교사를 괴롭히려고 하기도 한다.
(이런 내 글을 보고,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잘못해 놓고 염치가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지극히 정상이며 상식적이다. 하지만 교사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 학교에서 근무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반 여학생 한 명과 다른 여학생이 자율학습을 마친 야심한 시각에 풀밭에서 싸웠다. 불러낸 학생은 우리 반 학생이었고, 먼저 우리 반 학생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낸 것은 상대방이었다. 둘은 머리를 부여잡고 싸웠고, 골절 같은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기다란 풀에 쓸려 양팔에 엄청난 찰과상을 입었다.
부모님은 자율학습을 마친 딸이 집에 들어오는데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팔에는 피가 흐르고 있으니 기겁하셨을 것이다. 불림을 당한 학생(그러니까 다른 반 학생)의 학부모님은 학교에 신고를 하셨고, 학교 폭력 사안이 되었다. 아직 20대의 철 없던 교사인 나는, 먼저 불러내 육체적 공격을 한, 우리 반 학생이 잘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공정하게 처리하기 위해 우리 반 학생을 사무적으로 대했다. 오죽했으면, 교무실에 온 상대방 학부모님께서 내가 상대방 학생의 담임선생님인 줄 아실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들도 학생부가 아니라 학년부 교무실에서 처리하던 시절이었다.
그게 공정한 것이고, 그게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설문 조사를 하면서 우리 반 학생이 초등학교 때 학교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였으며, 자신을 따돌렸던 아이들을 다시 자신이 따돌리면서 복수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자신은 자신감이 생겼다고 적었는데, 그 자신감의 정체는 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절박함에서 나온 방어적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건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참으면 안 된다’는 것에 가까웠다.
다른 반 학생은 아버님이 찾아와 학생의 사과를 받았다.(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부모 가정의 가장인 우리 반 학생의 어머니는 오시지 못했다. 자신을 질책하는 어른들 사이에 홀로 버티던 학생의 작은 체구가 떠오른다. 잘못했으니 그게 당연한 거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과는 별개로, 그 학생을 우리 반 학생의 한 명으로서 조금은 따스하게 대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운 감정은 10년이 넘게 지나도 종종 생각난다. 담임교사의 책임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뿐 아니라, 학생이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도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돕기 위해서는 학생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있어야 한다.
교사는 판단과 이해 사이 어디쯤 있어야 할까?
나름의 답을 적어보았지만, 나 역시 아직도 저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부족한 교사일 뿐이다.
어쩌면 위와 같이 학교 안에서 교사가 중재하면서 학교 폭력을 처리하던 시절이 인간적인 해결이 가능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학교폭력 사안을 신고하면 관련 학생과 학부모는 그 과정을 누구와 소통할 수도 없이 홀로 감당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면 또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너무 과도하게 ‘학폭위’가 개최되는 것은 아닌가?
결국 ‘혐의없음’으로 끝날 이런 학폭위를 열 필요가 있을까?
문제는 어떤 일을 학폭위로 올릴지 아닐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교사는 학교 폭력 사안을 인지한 순간 신고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어떤 게 괴롭힘이고 어떤 게 놀이이고 장난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아 판단이 어렵다.
어떤 장난은 교사가 보기에는 명백하게 부적합하고 폭력적인 소지가 있지만 관련된 당사자 모두가 이것은 폭력이 아니고 장난일 뿐이며, 우리는 친하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생은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타인의 행동이나 말투, 시선을 의식하고 의미를 오해한다.
폭력으로 느끼는 행위조차도 칼로 무 자르듯 딱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성격적, 기질적 특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이 명백한 폭력 행위도 존재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학교 내에서 가장 처리하기 힘들고 오히려 복잡한 일은 명백한 폭력 행위가 아니다.
예를 든 것처럼 원래 친했던 아이들이 관계가 틀어져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꼽을 주는 행위이다. 이런 경우 서로 친할 때 한 친목을 도모한 행동들이 서로의 약점이 되고, 그때 털어놓은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들이 다른 학폭으로 연결되어 아주 상황을 지저분하게 만든다.
또, 자칫 교사가 “이 정도는 그럴 수 있지, 그냥 무시해” 정도로 일을 끝냈다가는 학교에서 학교 폭력을 방관하고 은폐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학생과 학부모가 동의한다면, 신고를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된다. 결국 학폭위의 양만 늘어나게 되고, 별 처벌도 없는 복잡하기만 절차만 반복된다.
그렇다면 학폭위라는 것은 불필요할까?
2019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우리 반 여학생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하교하던 중 버스 안에서 중학교 친구였던 학생을 만났고, 그 아이와는 한때 친했지만 관계가 틀어진 뒤로는 지속적으로 꼽을 주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했다.
내 제자였던 그 학생은 그 어려움을 중학교 시절 담임 교사에게 말했다. 학생부 조사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학폭위에는 넘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결과는 그 아이가 떠안게 되었다. 3학년 한 해 내내, 그 학생은 학교에 거의 오지 못했고, 그 힘든 시간을 혼자 버텨야 했다.
학교에서는 학폭위에 회부하지 않는 대신, 이 학생이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아도 출결을 배려(라고 하고 조작이라고 읽자)하여 졸업시켰다. 그런데 졸업 후 자신을 꼽 주던 그 학생을 버스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더란다. 학생은 너무 무서워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상대방이 “나 무시해?”라고 소리치며 이 학생의 뺨을 때렸다. 다행히 옆에 같은 반 친구가 있어서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고 뺨을 맞고 울던 이 학생을 챙겨 버스에서 내렸다. 그 후에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기가 찼다. 어떤 관리자는 학교에서 학교 폭력 사안이 생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런 사안으로 학폭위가 열리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을 담임교사와 학생부의 무능력이라고 판단하며 ‘알아서, 자연스럽게’, 예전의 방식으로 처리하고 싶어 한다. (물론 이제 7년이나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그런 관리자가 없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반 학생이었던 피해 학생만이 인내하며 각자 다른 고등학교 갈 날만을 기다리다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문제는 상대방은 전혀 반성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학교로 진학했지만, 사는 지역이 비슷한 두 학생은 결국 버스에서 마주치게 되었고 더 큰 피해를 낳았다. 결국 학교 간의 연합 학폭위가 열려(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때였다.) 상대방이 처벌받았다.
학폭위를 과도하게 사용한다는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한다면 학교 폭력의 종결은 학폭위를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의 고통은 ‘폭력’이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고 뿌리 깊게 피해받는 학생을 따라다닌다. 학폭위까지 가는 절차는 길고 복잡하다. 그 과정에서 학생, 가족, 교사 모두 지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해 학생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낀다. 진정한 반성인지는 모른다. 학교 폭력의 처리 과정이 굉장히 성가시다는 것을 경험한 것만으로도 다른 학교 폭력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볼드 처리한 부분은 각주표시입니다.
각주 17) 그래서 담임 교사 입장에서 제일 난처한 것은, 학급 안에서 학교 폭력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이럴 때는 한쪽의 입장을 변호할 수 없고 절대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양쪽 모두에게 섭섭함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다. 또, 가해와 피해가 확정되더라도 가해 학생이라고 해서 차별 대우를 할 수도 없고, 학급의 구성원으로 존중해 주어야 하니 피해 학생 입장에서는 얼마나 꼴 보기 싫겠는가. 그렇다고 모든 학교 폭력 사안을 학급 교체나 강제 전학으로 해결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