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되는 순간들
말이 칼이 되는 순간들
1) 엄마가 무슨 죄니?
그럼 이런 패드립은 대한민국, 아니 조선 땅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미국 힙합 가수들이 밥 먹듯이 ‘son of a bitch’, ‘Mother fucker’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패륜적 비방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패드립은 거의 ‘엄마’를 걸고 넘어진다. 점순이처럼 참신하게 아버지를 대상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머니’, ‘엄마’에 대한 욕이 많다. 왜 그럴까?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니 반박 시 당신 말이 맞다)
첫 번째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나의 근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아버지의 염색체와 어머니의 염색체의 만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출산의 과정이 여성에게 일임된 만큼 많은 사람이 자기 근원을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머니에 관한 욕은 나의 근원, 그 토대에 대한 비방이며 그곳에서 태어난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된다.
왜 남자(아버지)는 나의 근원에서 배제되는가? 어머니는 아이를 내 몸의 일부분에 담고 있다가 출산한다. 그러므로 출산한 아이가 내 아기가 아닐 확률은 대리모가 아닌 이상 0퍼센트다. 그런데 남성은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나의 배우자가 출산한 아이가 확실히 나의 아이가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남성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자녀와의 결속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더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 욕보다 어머니 욕에 더 발끈한다.
두 번째로는 많은 문화에서 어머니는 헌신과 사랑의 상징으로 여긴다. ‘모성’이라는 것은 굉장히 숭고한 것이며, 여자는 ‘어머니’로서 재탄생된다. 그리고 자녀는 이러한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부재한 아이는 다른 아이에 비해 부족한 사람이라고 인식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자녀들은 어머니의 희생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렇기에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모욕에 더욱더 치명적인 상처를 받는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남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를 자신의 여자로서 사랑한다. 그러나 엄마를 가질 수 없다(엄마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엄마를 가진 아버지를 동경하게 되는데 그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남성에게 어머니에 대한 모욕은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모욕이라 할 수 있다.
여학생의 경우에는 어머니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어서 패드립이라는 것에 본능적으로 저항감이 있다. 그래서 사용하기를 꺼린다. 남학생의 경우 어머니를 매우 사랑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나와는 다른 존재로 타자화한다. 그래서 욕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욕설의 대상이 되었을 때 더 분노감도 큰 것 같다.
세 번째로는 보통 욕이라는 것이 여성에 대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남학생들이 싸울 때도 상대방을 더 기분 나쁘게 하려면 ‘놈’보다는 ‘년’을 사용한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싸울 때 상대방을 더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해 ‘놈’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같은 말이라도 ‘놈’보다 ‘년’이 더 기분 나쁘다. 우리 문화에 뿌리 깊이 남아있는 성차별적 인식을 욕에서 찾을 수 있다.
이유가 어떻든 패드립은 나쁜 것이다. 어느 누가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겠는가. 그 이유는 일단 패드립이 성차별적 요소가 강하며, 인간이면 하면 안 되는 패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드립이라는 단어가 ‘드립’이라는 가벼운 말로 포장되었을지라도,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에서 상대방이 지닌 입장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개념 자체를 겨냥하는 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lnfante(1986)와 Wigley(1986)가 정의한 ‘공격적 언어’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런 점에서 패드립은 명백한 언어 폭력이다. 자아 개념을 공격당한 사람은 당황, 분노, 수치심을 넘어 자존감 손상, 우울, 심리적 위축 등 장기적인 정신 건강에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청소년이 욕설을 사용할 경우, 정서 불안, 공격성 증가, 대인 관계 갈등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김용수, 2014).
‘언어는 존재의 집’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이다. 인간의 사고나 생각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언어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사용자의 사고를 제한하고 이는 편견으로 이어지며, 그런 편견이 실제 차별로 이어진다. 학생들이 패드립의 본질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사용한다고는 해도 그러한 표현의 사용이 반복된다면 알게 모르게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을 배울 수도 있다.
이는 곧, ‘패드립’과 같은 공격적 언어가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사회적 편견과 혐오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제민경, 2017)
2)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적인가?
2014년의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전국민이 알게 된 인터넷 커뮤니티 집단이 있었으니, 이른바 ‘일베’라고 하는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일베란 ‘일간 베스트’의 줄임말로 하루에 웃긴 이야기나 짤방 같은 것이 올라와 그것의 순위를 가리는 일종의 유머 사이트였다.
그 사이트가 점점 정치적으로 변질하여 극우 성향의 남성 유저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 비하, 특정 정치인 비하, 여성 비하, 친일성향 등 과격한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원하며 단식하는 부모님 앞에서 치킨과 어묵을 먹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하면서 유명해졌다.
일베가 유행시킨 여러 혐오 표현이 있지만 성차별적인 표현으로는 명품만 밝히는 ‘된장녀’, 남성에게 비싼 선물이나 비싼 식사 등 얻어먹는 행위를 일삼는 ‘김치녀’ 같은 표현이 있다.
일간 베스트의 여성혐오에 대항하는 사이트로는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있었고, 이는 남성혐오를 바탕으로한 여성 유저들의 모임이었다.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전신인 메르스 갤러리와 『이갈리아의 딸들(1977)』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국가 이갈리아의 합성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가상의 사회 ‘이갈리아’를 배경으로, 성별에 따른 권력 구조와 사회적 불평등을 풍자한다. 남성이 했을 때는 거부감과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는 일이 여성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현상을 보며 우리 사회의 남녀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그래서 메갈리아의 기본적인 저항 방식도 여성에 대한 혐오표현을 남성으로 반사하여, 여성이 느끼는 감정을 남성이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방식을 ‘미러링’이라고 하는데, 기존의 차별·혐오 표현이나 구조를 그대로 따라 하되, 차별받는 쪽과 하는 쪽을 바꾸어 보여주어 차별이나 폭력이 얼마나 부조리했는지를 거울(미러, mirror)처럼 비추어 보여주는 것이다. 메갈리아에서는 ‘된장녀’, ‘김치녀’와 같은 표현을 미러링하여 ‘한남충(한국남자 벌레)’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이는 본격적인 남녀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일간 베스트도 예전보다는 영양력이 약해졌고, 메갈리아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쏘아 올린 남녀 갈등은 점점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더욱 심화하고 있다.
현실에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남녀 모두 서로를 도우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 특히 댓글 창만 들여다보면 마치 서로를 증오하고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메갈리아가 미러링이라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안의 차별적 혐오 표현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준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사고가 언어에 갇히듯 남성 차별적인 언어 안에 그 사고가 갇혀 버린 여성(특히나 어린 여성)들이 생겨난 것은 안타깝다.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모든 공동체는 서로 화합하며 살아가는 동지라는 인식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여성과 남성이 어떤 지위나 소득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이 아니다. 척결해야 하는 적도 아니다. 남녀가 서로를 인식하는 바탕은 바로 공존이었으면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
루소의 말처럼 삶이란, ‘만인(滿人)의 만인(滿人)에 대한 투쟁’이 아니던가. 내가 무엇을 얻으려면 그것을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서 빼앗아 와야 한다. 여성의 지위가 강해진 만큼 남성이 그 지위를 잃어버렸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감정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고등학생이 2차 성징이 완료된 비교적 성인에 가까운 신체와 정신적 성숙을 갖추었다면(고등학생이면 아직 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중학생을 지도하다 고등학생을 지도해 보면, 고등학생 정도면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반대로 말하면, 당신이 중학생과 대화를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패드립’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즘 젊은 남성의 여혐(여성혐오의 줄임말)의 수준이 위험할 정도로 강해진 것 같다. 이 역시 2015년에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와서 느낀 점인데, 남학생들이 여성가족부를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가 게임 셧다운제를 실시한다는 것이 혐오의 이유였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부모님의 제약이 학생들에게 강한 영향력이 있다 보니 게임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셧다운제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고, 그것을 만든 이가 여성가족부이기 때문에 여성가족부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중학생 때는 남성과 여성의 특성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도 중학교 1학년 학생을 가르치면서 새로 깨달은 점이었다. 고등학생을 담임할 때는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은 남학생들이 알아서 척척 들어주곤 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담임을 하면서 남학생을 시키려고 보니 다 나보다 작았다. 결국 우리 반에서 힘이 제일 센 사람은 바로 교사인 나였는데 책상도 나르고, 책도 나르고 하다 보니 정말 힘들었다. (교사도 의외로 힘쓸 일이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남자니까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이 당연한가?’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1학년까지는 여성이 남성보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먼저 성숙한 느낌이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하던 대로 “남자가 무거운 거 들어야지.”라고 하면 중학교 남학생들은 “쟤(여학생)가 저보다 힘 더 세요.”라고 대답하는데 실제로 여학생이 더 크고 힘이 세기도 하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아직 어린 초등이나 중등 저학년 학생에게 함부로 “남자가-” 같은 말을 사용하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남학생들이 ‘여성가족부’를 혐오하고, “사회는 남자가 더 살기 어렵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양성평등에 대한 개념도 나이에 따른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대 초반의 남학생들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이 어린 남성은 남성으로 무언가를 누릴 기회를 얻지 못했다. 체격이나 명석함으로도 아직 또래 여학생들에게 밀린다. 남성이 거의 씨가 마른 초등학교에서 여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가정에서도 엄마의 기에 눌려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은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하고(여학생이 더 힘이 센데!), 싸움에도 여학생에게 밀리며(말싸움, 몸싸움 모두!) 특정 색깔의 옷을 입지도 못하고, 울음을 참아야 한다는 것 등의 차별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 학부모님과 상담하다 보면, 자녀의 성격에 대한 결함을 걱정하여 상담하는 쪽은 항상 남학생의 학부모님이었다. 너무 숫기가 없다거나, 밖에 나가 친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리더십이나 강인함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 주된 걱정거리였다. 그에 비해 친구를 잘 못 사귄다거나 집에만 있어서 걱정이라는 여학생 부모님을 뵌 적은 없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아직 남자라고 하는 성(性)에게 한국 사회에서 기대하는 바가 여성보다 큰 것 같다.
학교라는 집단은 기본적으로 여초(女超) 사회이며, 남녀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오히려 남학생의 학부모님은 수행평가와 같은 평가 방식이 남학생에게 불리한 구조라고 하며 여학생에게 더 유리한 것이 문제라고 하기도 한다.
남아선호사상에 찌들어 있던 우리 할머니 세대와 요즘 아이의 할머니는 다르다. 그래서 가정 내에서 이전처럼 성차별을 겪는 비율도 줄어들었다.
조남주의 소설 『1982년생 김지영(2016)』에 등장하는 할머니를 보면 내가 어릴 적 자연스러웠던 남녀 차별을 알 수 있다. 할머니는 주인공인 김지영이나, 그의 언니 김은영보다는 남동생인 김지석을 더 챙긴다. 지석이에게는 원하는 간식을 고르게 하고, 지영이나 은영이에게는 “사탕이나 사 먹어라.”라고 하며 편애한다. 고기 반찬도 지석이 앞으로만 내민다.
또, 김은영은 성적이 상위권이었고, 의사·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도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여자애가 밤늦게 다니면서 그 힘든 공부를 어떻게 하냐’는 사회 분위기에 따라 사범대에 진학한다.
당시에는 여성의 출산 휴가도 짧았고, 육아 휴직도 어려운 시대였다.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이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이 공무원이나 교사 정도였기에 김은영은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현실에 순응한다.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한 남학생들이 더 큰 꿈을 꿀 수 있다는 현실에 불만을 품지만, 조용히 분노하거나 체념하는 모습에 그친다.
84년생인 내 경험도 다르지 않다. 우리 할머니는 남자인 내 동생을 편애했다. 내 친구들은 서울에 진학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어도 여자는 멀리 대학 보내는 거 아니라는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지방국립대에 진학했다.
최근에는 여학생들이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 동안 과거와 같은 명시적인 성차별을 체감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오히려 가정에서 보호받으며 공주님처럼 자란 여학생들이 많아졌다. 이 역시도 올바른 성평등은 아니다. 공주가 되어 왕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성을 길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회에 진입하는 순간, 여성은 자신이 여성이기에 받는 대우에 대해 인식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결혼과 출산이 여성의 직업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사회보다는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이라도 여학생이 차별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이 하는 ‘얼평’(얼굴평가)에 시달린다. 외모가 곧 존재 가치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는다.
그에 반해 남학생들은 외모보다는 체격(키), 운동성, 리더십이나 사회성 같은 것들이 총체적으로 융합되어 ‘남성성’이라는 것으로 평가된다. “남자가-”, “남자니까-” 같은 말로 남학생들을 규정하면서 이전 세대의 문화를 답습하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남학생들은 아직 너무 어리고 약하다. 그 속에서 남학생들은 ‘여성에게 통제당한다’는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학생에게 경쟁심이나 반발심을 느낀다.
아직 남성성이라고 부를 만한 조건을 채 갖추지 못한 이 어린 남학생조차도 ‘강한 남자’, ‘남성성’에 대한 동경과 욕망은 있다.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중에는 굉장히 깐깐한 교사 같은 학생들이 있는데, 남학생들은 이런 여학생을 질색한다. 물론 이런 여학생도 장난꾸러기 남학생을 질색한다. 이런 교사 같은 학생은 정석(定石)적인 사고로 남학생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조용히 해.” 등과 같이 엄마나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를 쓰면서 남학생들에게 바른 말(잔소리)를 하는데, 남학생들은 그 말이 정당하든 말든 동급생이 그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빠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채 여성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3) 있지만 없는 존재가 있다?
남학생이 자신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에 반감을 느끼면서도, 동경의 대상으로도 삼는 이중적 태도 때문일까? 남학생들이 잘 사용하는 말에서 연약하고, 여린 남학생을 비하하거나 괴롭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 표현이 있다. 그런 것이 잘 드러난 말이 바로 ‘게이 드립’이다.
‘게이’라는 말은 원래 즐겁고 활기찬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성의 경우,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여성을 ‘레즈비언’이라고 부르며, ‘게이’는 주로 남성에게 쓰이는 표현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동성애에 대해 배타적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차별을 받는다. 그 차별이 두려워 감히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을 꺼린다. 동성애를 아직도 정신병의 일종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유독 비아냥의 대상으로는 ‘레즈비언’이라는 표현보다 ‘게이’라는 표현이 훨씬 많이 쓰인다.
교실 상황이나 학생들의 발화 상황에서 여학생이 여학생을 비하하기 위해 “레즈비언 같아.” 혹은 “레즈비언이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상황을 접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남학생들은 “게이 같아.” 혹은 “게이냐?”, “게이래요.” 같은 말을 비하하거나 놀리는 용어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어떤 남학생이 ‘남성적’이지 못할 때 그것을 놀리는 말투로 “게이냐”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남성적이지 못한 경우는 눈물을 보인다거나, 나약해 보인다거나, 말투가 수다스럽다던가, 지나치게 외모를 치장하거나, 여학생들과 주로 어울리거나 하는 식으로 대중이 없다.
대체로 “게이냐” 같은 발언을 하는 학생은 실제로 이 학생이 게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발언이 아니다.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할 작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2021년 미국 겔럽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약 5.6%가 자신을 LGBTQ+로 식별한다고 보고되었다. 이 중 동성애자(게이와 레즈비언)의 비율은 대체로 2-3% 정도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2020년의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성소수자(게이, 레즈비언 등)의 비율은 약 3-4% 정도였다.
물론 소수지만 이 비율을 우리 학교의 학생에 대입한다면 약 800명의 학생 중 최소 16명에서 32명의 학생이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교사든 학생이든 우리 중에 이성애자가 아닌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사랑은 오로지 이성애이다. 모성애와 가족의 사랑을 나타낼 때도 우리는 남녀의 결합과 출산으로 아이를 가진 가정을 일반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교과서에서 다양한 성적지향과 가정의 형태를 배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것들이 아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의견 또한 강력하다.
나는 가끔 경북도청 앞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시위를 목격하곤 한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나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합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인 차량을 보기도 했다.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에 대한 유무(有無)는 찬반의 영역이 아니다. 명백한 것은 그들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인 이상 우리는 한 번쯤은 그런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나처럼 말이다.
담임을 하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스승의 날을 기념해 찾아왔다. 성인이 된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학생들과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술도 한 잔 마시게 되었는데 어떤 테이블의 분위기가 너무나 진지했다.
시간이 지나서 꽤나 빠르게 고주망태가 된 그 테이블의 학생들과 이야기하는데 그중 한 명이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예술적 재능을 가진 학생이기는 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라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절대로 놀라지 않고, “그랬구나”하고 받아들였다. (교사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어떤 일에도 의연하기’다)
엄청나게 취한 그 학생은 자신이 중학교 때부터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 때문에 고등학교 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교 진학으로 혼자 살게 된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내가 담임이었을 때 그 학생이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는 사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절대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생각보다 나와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게이’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을 바로 곁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게이 커뮤니티의 좁디 좁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해야 하는지도, 평생 동안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외로움이 얼마나 사무치는 것인지 들었다. 나를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는 존재의 부재,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하는 두려움을 늘 품고 사는 학생의 마음을 나는 차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사랑과 관심의 시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고 답하고 싶다. 혹한의 겨울에 ‘오늘 같은 날 노숙자들은 어디서 자나, 동사에 걸리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식의 한쪽에 노숙자가 존재한다. 노숙자에 관한 관심과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나는 1년에 한, 두 번씩은 남학생들이 ‘게이’ 어쩌구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진심으로 화를 낸다. 어쩌면 이 교실에 있을 한 학생이 이런 말을 들으며 ‘아웃팅’ 당하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어 비하나 차별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생각보다 그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남학생들이 ‘게이’에 대한 언급을 하는 이유는 게이를 남성성이 없는 부족한 존재로 인식함과 동시에 우리 중에는 ‘게이’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숨죽이며 자신을 숨기려고 애쓰는 어떤 이에게는 이런 말들은 칼처럼 와 박힐 것이다.
다시 패드립으로 와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패드립 역시도 이런 생각으로 내뱉는 말이다. 당연히 ‘엄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마 없냐?”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를 하면 알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이 이성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형태가 있는지를!
이혼가정, 재혼가정,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1인가정, 입양가정 등 그리고 어떤 가정은 이런 명칭 중 하나만 가지고 있지 않고 여러 개를 가지고 있다. 입양가정이면서 이혼가정이고, 다문화가정이면서 조손가정일 수도 있고, 재혼 가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한부모 가정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명칭이 변경되기도 한다. 이혼가정이 재혼가정이 되기도 하고, 재혼가정이 다시 이혼가정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학생의 인생에서는 이게 드라마인가 실제인가 혼미할 정도로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의 학생들은 남들보다 혹독한 사춘기를 겪으며, 건강하고 긍정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
‘엄마’와 ‘아빠’를 당연하게 소유한 학생들의 생각과 다르게 우리나라의 한부모 가정 비율은 2016년에 벌써 18%를 넘긴 수준이다.(babynews, 2016) 그래서 이런 패드립을 진짜 해당하는 학생에게 했을 때는 거의 필연적으로 학교 폭력이 일어난다.
얼마 전에 사별한 지인의 아들이 친구에게 “엄마 없냐”라는 말을 듣고 “넌 에미 있는 놈이 왜 그러냐”라고 받아쳐 학교 폭력 신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학교 폭력으로는 명백한 ‘쌍방과실’이지만 마음으로는 그런 말을 한 지인 아들의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
볼드 처리한 부분은 각주표시입니다.
각주 31)『말이 칼이 될 때(2018)』는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가 출간한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 점점 심화하는 혐오 표현의 문제를 법적·사회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나는 이걸 국어 교사로 전과하고 받은 두 번째 1급정교사 연수에서 토론 숙제로 읽었다.
사범대를 졸업하거나, 교직이수를 하면 2급정교사 자격증을 받게 되고, 교사 경력이 3년 이상이 되면 연수를 통해 1급 정교사가 될 수 있다.
각주 32) 짤방은 한국 인터넷 문화에서 나온 용어로, ‘짤림 방지용 이미지’의 줄임말이다. 원래는 게시판에 글만 올리면 삭제(짤림)되는 걸 막기 위해 올리는 이미지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넓은 의미로 쓰인다.
각주 33) 여담이지만 당시에는 ‘-충’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어서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요즘 시대가 문제라는 신문의 칼럼도 있었다. 혐오 표현도 유행이 있는지 요즘은 ‘-충’으로 끝나는 말은 생명력이 다한 것 같다. 한남충이라는 말도 충이라는 글자를 빼고 ‘한남’이라고 불리고 있다.
각주 34) 대한민국의 게임 셧다운제는 청소년의 심야 게임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청소년의 수면권 보호와 게임 중독 예방을 목적으로 만 16세 미만 청소년이 밤 12시부터 오전 6시까지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청소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게임 산업 발전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모바일 게임과 같은 다른 플랫폼에는 적용되지 않아 형평성 문제도 지적되었다. 결국 이러한 논란과 비판 속에서, 셧다운제는 2021년 8월 폐지되었다.
각주 34) 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각주 36) 동덕여대 사태(동덕여자대학교에서 일어난 남녀공학 전환 논의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보라...
각주 37) 섬세한 사람은 내가 이전 문장에서는 ‘남성과 여성’이라고 적었고, 다음 문장에서는 ‘여성과 남성’이라고 적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순서가 무슨 상관이야, 이런 느낌이 드는가?
각주 38) ‘여(女)’는 여자, ‘초(超)’는 초과하다라, 많다는 뜻으로, “여초 회사”, “여초 커뮤니티”, “여초 카페” 등으로 쓰인다.
각주 39) 이런 대화들이다.
1. 감정 표현했을 때
A: 아 진짜, 영화 보면서 울컥했어…
B: 뭐야ㅋㅋ 게이냐? 왜 울고 그래~
2. 외모 꾸밀 때
A: 이거 선크림 바르면 피부톤 좀 균일해져.
B: 야야, 게이냐? 왜 이렇게 꾸며ㅋㅋ
3. 말투가 다정하거나 수다스러울 때
A: 어제 걔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러니까—
B: 헐ㅋㅋ 게이냐? 왜 이렇게 수다 떨어~
4. 여학생들과 어울릴 때
A: (여학생들과 웃으며 대화 중)
B: 야 또 거기 껴 있네~ 게이냐? 왜 맨날 걔네랑만 놀아?
각주 40) 아웃팅(Outing)은 사람의 사회적 신분(social status) 또는 성향을 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누설하는 일이다. 특히 성소수자 담론에서는 타인이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성소수자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타인에게 드러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커밍아웃의 반대말 격이다. (나무위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