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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 Oct 24. 2021

한여름 낮의 꿈

비오는 날에는 숲으로 가요

 비 오는 날엔 무조건 집콕이 철칙인 집순이가 비 내리는 숲을 걷고 있다. 출근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더군다나 발이 축축하게 젖는 걸 질색해서 비 오는 날에는 약속도 웬만하면 취소하는데, 역시 책임감이 불편함을 이겼다. 우산을 꼭 쥐고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질퍽한 산책길을 조심조심 걷는다. 투둑 투두둑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리듬에 따라 발걸음을 내디딘다 다행히 비가 걷기에 딱 좋을 정도로 내려서 한 걸음 한 걸음 빗소리에 맞추어 걸었다. 비 오는 날의 숲은 진하고 선명하다. 온몸으로 비를 받아내고 있는 초록 잎들이 말간 얼굴을 드러내 반짝반짝 빛난다.


 비가 와서 책방 내부의 정돈상태만 확인하고 숲을 마음껏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없어 ‘이 숲이 내 숲이다!’라는 마음으로 걸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속도로 내 마음대로 걸었다. 비 내리는 숲속, 자그마한 우산에 폭 쌓여있는 기분이 꽤 좋았다. 내 머리 위 우산이, 나를 둘러싼 숲이 꼬옥 껴안아 주는 느낌이 들었다. 추운 겨울날 방에서 이불을 둘둘 감고 방바닥을 뒹굴 때 느끼는 포근함 같았다.



 빗줄기가 거세져 정자로 몸을 피했다. 솨악 솨아악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숲이 내는 리듬을 듣는다. 도레미-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나듯, 투둑 툭- 빗방울이 잎사귀를 두드리면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계이름을 따라 건반이 내는 음이 다른 것처럼 잎사귀는 모양에 따라 내는 음이 다르다. 큰 잎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툭, 뭉툭한 소리. 작은 잎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톡, 가벼운 소리.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잎에 빗방울이 닿으면 또독 톡! 엇박자의 경쾌한 리듬이 만들어진다. 숲이 들려주는 음악이 푹 빠져 매번 듣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키는 것도 잊어버렸다. 습관처럼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을 빼내어 가방에 슬며시 집어넣는다. 자,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숲이다! SONG BY GOMSOL NURI FOREST(feat. rain), MADE BY GOMSOL NURI FOREST.


 숲이 들려주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숲이 보여주는 푸른빛 고요한 풍경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제 비 오는 날 집콕은 글렀다. 이 음악을, 이 풍경을 다시 찾을 것만 같다. 비 오는 날이면 지금, 이 순간이 떠올라 뛰쳐나오고야 말 것 같다.



 빗방울 사이로 해가 스며든다. 여우가 시집가나? 부스스 내리던 안개비마저 그치고 숲의 뽀얀 얼굴이 드러났다. 정자 밖으로 나와 팔을 뻗고 온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깊은 밤, 달콤한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나 홀로 나만의 숲에서 꾼 비 오는 한여름 낮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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