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이 평등을 뜻하지는 않는다
흔히 블록체인은 탈중앙화 되어 있다고 말한다. 탈중앙화에 대한 정의는 명확히 규정된 것은 없지만 대개 1) 해당 시스템의 운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참여자가 없는가(구조적 탈중앙화), 2) 누구나 원한다면 다른 누군가의 허락 없이도 참여할 수 있는가(정치적 탈중앙화)가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1]. 예컨대 ‘우리은행’ 중앙 서버가 다운되면 전국적으로 큰 타격이 있을 것이고, 내가 원한다고 해서 당장 나만의 화폐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현재 금융 시스템은 탈중앙화 되어 있지 않다는 식이다. 이 두 가지 조건 덕분에 블록체인은 중개자를 제거할 수 있고, 실제로 네트워크에 기여한 사람이 중개자의 수익을 나눠가질 수 있는 부의 재분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며칠 전 비트코인 보유량이 얼마나 탈중앙화 되어 있나 이야기를 하다가, 비트코인 주소별 보유량을 검색해보게 됐다.
위 그래프는 BTC 보유량을 구간별로 나누어 분석한 것으로, 막대그래프는 해당 구간에 속하는 주소의 개수고 꺾은선 그래프는 구간에 속한 주소의 BTC 보유량을 모두 합한 양이다. 대부분의 주소가 0.1 BTC 이하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소수의 주소만이 가시적인 양의 BTC를 갖고 있다. 비트인포차트에 따르면 상위 약 1%의 주소가 총 비트코인의 87.18%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2018, Aug 3)[2].
여기에서 개인이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주소들만 비교해보기 위해 ▲10,000 BTC 이상을 보유한 상위권 거래소 주소를 제외하고 ▲휴면 주소로 추정되는 0.001 BTC(약 8천 원) 이하의 주소를 제외해봤더니 상위 0.0008%가 전체 비트코인의 13.9%를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나라보다 빈부 격차가 큰 미국에서도 상위 0.01%가 총자산의 11.2%를 갖고 있다고 하니[3], 오히려 현실세계에서보다 비트코인에서 부의 집중화 현상이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셈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더리움 등 다른 주요 암호 자산에서도 집중화 현상은 발견된다. 왜 탈중앙화 생태계에서 이런 일이 더 심하게 발생하는 것일까?
우선 암호 자산을 처음 보유한 시점에 따라 구입 단가 또는 채굴 단가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오르내림을 무시하더라도 비트코인은 2008년 이래로 지속적으로 상승해왔다. 특히 2017년 중순에 비트코인을 구입한 사람과, 급격한 상승이 있던 2017년 말에 비트코인을 구입한 사람은 구매 가격이 1 BTC 당 1,900만 원에 달하는 차이가 난다[5].
물론 개별 차가 있겠지만 대개는 얼마나 자주 ‘비트코인’에 노출되었느냐로 암호 자산 진입 시점이 달라지기도 한다. 영어로 된 비트코인 백서를 얼마나 빨리 접하고 읽어볼 수 있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비트코인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오픈 소스 커뮤니티에 관심이 있었는지 같은 요소들 말이다. 크게는 문화권 차이에서부터 구체적으로는 종사 직업군도 큰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비트코인은 개발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비트코인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컴퓨터 공학적 소양과 배경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비트코인 주소를 생성하려고 하면 어느 수준 이상의 컴퓨터 지식을 필요로 하므로, 궁극적으로 비트코인을 얼마나 빨리 알게 되었는지는 정보 기술과 교육 수준의 차이로 귀결된다고도 볼 수 있다. 블록체인에 대한 이해도는 나아가 어떤 암호 자산을 구입할지, 어떤 것이 스캠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치며[6], 비트코인은 국경이 없는 자산이기 때문에 정보 기술 숙련자와 비숙련자의 암호 자산과 투자 기회 격차는 더욱 심화된다[7].
최근 40년 간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은 꾸준한 비율로 증가했지만, 노동자의 임금 비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업의 입장에서 임금이란 최소화할수록 좋은 ‘비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저임금 노동자에게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시장은 공적인 영역으로, 소수만이 참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히 탈중앙화 된 프로토콜 시장은 공공 커뮤니티에 더욱 의존하기 때문에, 블록체인 시장을 장기적으로 성장시키고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양극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 경제에서 재산세나 보유세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토큰 모델을 디자인하거나,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통해 최저 임금제, 기본 소득제 등을 닮은 다양한 정책을 실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곧 탈중앙화 생태계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다.
부의 양극화는 정보 기술과 교육 수준의 차이로 가속화되어 왔다[10][11]. 단순히 중개자를 제거해 기여한 만큼 보상받는 플랫폼에서는 교육 환경, 기존 자산 수준 등에 따라 사람마다 기여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빈익빈 부익부의 결과로 이어지는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탈중앙화 세상에 진입하면서 우리는 효율성만 따졌던 지난 인류의 역사와 달리 개개인의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프로젝트에서 단순히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사람에게 더 큰 이익을 주는 기존의 모델을 답습하고 있다. 실제로 네트워크에 기여하고 활동한 사람에게도 충분한 가치가 돌아가는 프로토콜을 설계하기 위해 더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처음부터 완벽한 탈중앙화를 조성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탈중앙화 생태계라고 해서 곧바로 ‘평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세상을 혁신시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자 한다면 계속되는 배움과 토론의 장을 통해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해시드도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앞으로도 치열하게 고민해보려 한다.
면책조항. 이 글은 매우 개인적인 의견을 담고 있으며, 해시드의 철학이나 다른 멤버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을 올리기 전에 최대한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지만, 읽는 이는 항상 정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글에서 제공하는 정보의 이용 또는 비이용으로 인한 피해, 또는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한 정보 이용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인용한 내용에 대해서는 미주에 출처를 표기하며, 별도 출처 표기가 없는 이미지는 저자가 직접 제작한 것입니다. 잘못된 내용에 대한 지적과 다양한 피드백을 환영합니다.
[1] Buterine, V. (2017, Feb 6). The Meaning of Decentralization. Retrieved from https://medium.com/hashed-kr/the-meaning-of-decentralization-kr-f7942cf9fed6
[2] https://bitinfocharts.com/top-100-richest-bitcoin-addresses.html
[3] Gold, H. R. (2017, Nov 29). Never mind the 1 percent. Let’s talk about the 0.01 percent.http://review.chicagobooth.edu/economics/2017/article/never-mind-1-percent-lets-talk-about-001-percent
[4] https://coinmarketcap.com/
[5] https://coinmarketcap.com/currencies/bitcoin/
[6] 원재연. (2018, May 8). 한방 노린 묻지마 암호화폐 투자 ‘땅치고 후회중’. 서울경제. Retrieved from http://decenter.sedaily.com/NewsView/1RZGCKGN38/GZ04
[7] Roser, M. and Cuaresma, J. C. (2016). Why is Income Inequality Increasing in the Developed World?. Review of Income and Wealth, 62: 1–27. doi:10.1111/roiw.12153
[8] The Productivity-Pay Gap. (2017, Oct). Retrieved fromhttps://www.epi.org/productivity-pay-gap/
[9] Income Inequality. Originally from Bureau of Labor Statistics. Retrieved from https://inequality.org/facts/income-inequality/
[10] Rotman, D. (2014, Oct 21). Technology and Inequality. Retrieved from https://www.technologyreview.com/s/531726/technology-and-inequality/
[11] Becker, G., & Murphy, K. M. (2007, May). The Upside of Income Inequality. Retrieved from http://www.aei.org/publication/the-upside-of-income-inequ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