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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진정한 객관적 의견 견지 고찰

대한민국 전문가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지식은 얼마나 객관적입니까?!

우리는 살아감에 있어 홀로 살 수 없기에,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류와 소통을 합니다. 이때 문제가 생기면 분쟁이 되고, 그 분쟁의 원인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 있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다 결국 제삼자의 의견을 물어 해결하려 하는 것이 오늘날 재판의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재판은 성문 법률주의,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글로써 구성된 법률 내용을 기준으로 다툼의 요지를 해석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며, 이때 증거에 기초하여 사실 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삶이 그렇듯 명징하고 오차 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법률 해석이나 사실관계 파악에 있어 증거 등이 모호한 경우가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을 뽑아 법을 가르치고 그동안의 많은 판례로 교육을 시켜 법관을 만들어, 통상 세 명의 판사에게 각기 세 번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함에도 불구하고 오심은 나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신이 아닌 이상 세상만사 인간 삶을 어찌 다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오심(誤審)을 영어로는 'miscarriage of justice'라고 합니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정의(正義)의 유산(流産)'입니다. 유산은 태아가 온전히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오심은 정의도 그렇게 됨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만큼 오심은 우리 사회에 큰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오심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심은 주로 명징하고 정확한 사실 관계 파악의 부재에서 출발됩니다. 그렇다면 심리적으로나마 오심에 대한 의심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많은 사람의 의견에 따르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 가장 큰 원칙인 다수결의 원칙에 익숙한 우리는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어찌 됐든 결론을 내려야 할 때 다수결의 의견에 그나마 공정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배심원 제도의 출발도 이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사실관계 파악에 있어서 해당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입니다.

그 의견이, 다수의 의견이나 심판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무게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전문가의 의견이 얼마나 공정하고 그 근거가 합당한 지를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묻지 마 식 믿음으로 전문가의 의견을 맹신하는 자세는 옳지 않음을 우리는 많은 사례를 들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소위 전문가라 하는 사람의 의견이 경우에 따라 막중함에도 우리가 무엇에 기초해서 그 의견을 청취해야 하는지 좀 더 심도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

*진정한: 참되고 올바르다.

*객관적: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또는 그런 것.

             <철학> 세계나 자연 따위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또는 그런 것.

*의견: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

*견지: 어떤 견해나 입장 따위를 굳게 지니거나 지키다.

*고찰: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함.


큰 제목'전문가의 진정한 객관적 의견 견지 고찰' 그대로를 각 단어별로 사전적 의미로 풀어서 적어보자면,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전문가)'의 '참되고 올바른(진정한)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함(객관적)'에 있어서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의견)'을 '굳게 지지한다(견지)'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연구해 보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객관적'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자기와의 관계, 즉 학연·지연·혈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앞선 사전적 의미에 적시된 바와 같이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선자는 이력, 학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후자는 경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력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학력은 경력보다는 다소 짧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같은 교육을 통한 졸업, 수료 등의 방식으로 이를 증명하기에 훨씬 더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는 선자가 간단명료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전자의 과정을 거쳐 후자의 경력을 쌓습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전문가의 길이라 누구나 인정할 것으로 생각하고 이견이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 문제가 학연, 지연, 혈연임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 전문가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지식은 얼마나 객관적입니까?!'

바로 이글의 소제목이기도 합니다.

소제목의 핵심 키워드는 '당신의 지식은'입니다.

즉, 당신 스스로 지식 습득에 있어서 철저하게 객관화된 정보를 습득하고 이를 재생산하여 당신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지에 방점을 찍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큰 제목의 방점인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소제목의 방점인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의견을 개진 할 수 있는지'를 합친 맥락에서 관통하는 질문의 핵심은 출신성분을 논하는 이 사회에서 함께 동문수학하며 얻은 동일한 지식 습득과정을 경험한 전문가들이 얼마나 객관적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까? 가 의문입니다.


전문가란, 분쟁의 정점에서 종국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판사나 배심원에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전문가는 그들에게 편향된 사고로 닫힌 생각을 하도록 자문하는 것보다는 다각도의 가능성에 대한 열린 사고로 모든 경우의 수를 산정해서 자칫 오판해서 그들이 오심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소임이라 생각합니다. 오심은 앞서 말했듯이 정의의 유산과도 같습니다. 법언에 의하면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하듯이 획일화된 교육과정에서 생성된 전문 지식이 얼마나 닫힌 결론을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위험성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영화 속 억울한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의견이 얼마나 객관적인지, 그리고 열린 자세로 다양한 가능성을 개진한 것인지, 그 진정성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객관적 과학적 보편적 합리적 근거를 담보한 것인지, 그런 근거가 제대로 제시되었는지, 그리고 그 인과관계있어서 오류는 없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재판에 있어서는 판사나 검사, 변호사가 자신의 입장에서 잘 살펴보리라 생각하지만, 과연 여타 상황에서도, 주입식 줄 세우기 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들이, 화려한 스펙의 이력과 경력을 앞세운 그들(전문가)의 어려운 말들 속에서 도출한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문 던질 수 있을지가 걱정됩니다.

따라서 다양한 전문가층이 형성되고 자립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이를 주목하고, 해당 분야에서 특정 학벌이 기득권층이 되어 어떤 전문 의견을 주도하는 것은 아닌지 제도적으로도 견제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명시적으로나마 복수의 전문가 의견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요?


'집단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질 때, 정답이라 착각하는 심리를 경계하라!'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아포페니아(Apophenia)'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포페니아: 서로 무관한 현상들 사이에 의미, 규칙, 연관성을 찾아내서 믿는 현상)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하나의 의견으로 도출시켜 추진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라 볼 수 있으나, 최소한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는 감정자문 전문가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자신의 분석 경험과 노하우로 과학적, 객관적, 보편적,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논리 논증을 해야 할 것입니다.


획일화된 의견이 어떤 결론을 내리는 데는 쉬울지는 모르겠으나, 오심의 개연성은 높아지리라 생각 드는 것은 저만의 노파심인지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최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첫 번째 침몰의 원인으로는 내인설, 그리고 두 번째는 열린 안 이렇게 두 가지 결론으로 나왔습니다. 혹자들은 이를 질타하기도 하지만, 결론 도출을 위해 무리수를 두어 추후 오심의 개연성을 높이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아니기에 인간이 조사하고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부지불식간에 발생한 참사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데 있어서 난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조사 결과를 통해서 얻었다면 하나의 결론입니다. 반드시 어떤 하나의 명시적 결론이 나와야 성과 있다는 생각은 또 다른 오심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사고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동안 늘 우리 사회가 경직되어있음을 자각하고 부인할 수 없었던 것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결과라 생각합니다. 유연하게 어떤 결과를 맞이하고, 다름을 배척하기보다는 포용하고, 소수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지 지양해야 할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론도, 방송도 제 각각의 목소리로 정보를 제공해야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처럼, 다양성과 획일성의 모순된 정답을 요구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답을 찾고자 할 때 누구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이 기회에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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