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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분석 맹점]뇌(기억)를 너무 믿지 마라!

확증 편향이 가린 의문을 찾아야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타이틀 사진=Life science/shutterstock]


확증 편향이 가린 의문을 찾아야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함에 있어서 사실을 확증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밤 중에 외진 골목 한가운데 가로등 밑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다.

유일한 목격자는 철수와 영희로 골목 양쪽 끝에서 각각 이 장면을 목격했다.

철수와 영희는 형사가 보여준 몇 명의 용의자 중 동일하게 한 남자를 범인으로 지목하였으나,

형사는 이 둘의 진술을 믿지 못했다.

이유는 철수와 영희가 목격한 범인의 살인 도구로 지목한 나무토막의 모양이 달랐기 때문이다.


도대체 철수와 영희는 왜 같은 범행 현장을 보고도 범인이 들고 있는 흉기의 모양을

다르게 묘사하였을까?


철수는 아래와 같은 물건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림 1>

사각형 나무토막이었다.


영희는 아래와 같은 물건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림 2>

원형의 나무토막이었다.


철수와 영희의 진술이 엇갈린다.

형사 입장에서는 범행 도구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둘 다 틀린 말을 하거나 아니면 둘 중 한 명이 잘못된 진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형사는 뒤늦게 둘 다 사실을 말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추후 피해자의 혈흔이 묻은 실제 범행 도구를 범인의 집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림 3>

범행 도구는 원통형의 나무토막이었다.


원통형의 나무토막은 측면에서 볼 때는 <그림 1>처럼 사각형으로,

위에서 볼 때는 <그림 2>처럼 원형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 밤 중에 범인이 휘두른 범행 도구가 가로등 불빛에 얼핏 보이기에는

각각 골목 양쪽 끝에서 철수와 영희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위의 예시에서 처럼, 

자신이 실제로 본 사실만으로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에는 다소 불확실한 것들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양한 가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의 사실, 하나의 단서에 매몰되어 예단하고 속단하여 실체적 진실을 성급하게

확증 편향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뇌는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과 번식에 최적화되어 있고,

그에 따른 사고와 판단을 하도록 우선시되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현재의 이런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는 오히려 더 그런 편향적 사고가 강화될 수 있다.

이유는 그래야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향적 사고는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프로세스이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뇌는 본질적으로 익숙함을 추구하고, 기억에 있어서도 관련성이 있음에 좀 더 비중을 두어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대표적인 것이 사후 과잉 확신 편향(hindsight bias)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된 후에 우리는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능동적인 과정이고, 

사후에 확정된 결과는 추가적 정보를 바탕으로 한 인지 재구축의 또 다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감각 정보를 바탕으로 지각하고 인지, 인식한 모든 지식에 대해서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잘못 기억하고 있을 수 있음을 재차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내 뇌를 있는 그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라는 말은, 

나 자신의 생각과 지식, 경험, 기억, 모든 것에 있어서도 해당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첫 번째, 예단 속단 단언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나의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한다.


두 번째, 사실관계를 파악할 때 서로 다른 모순된 상황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위에 사례에서처럼 철수와 영희는 같은 상황을 경험했음에도 서로 다른 진술을 하고 있고,

이 두 진술이 모두 진실에 포함된 사실임을 감안할 때,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세 번째, 열린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고전 물리학의 거시적 물리 역학 관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현재 물리학의 미시적 양자 역학의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전부일 때와 하늘과 땅이 둥글고, 이를 넘어 돌고 있고

우리 세상 너머에 우주가 있음을 자각할 때와는 새삼 마음가짐이 달라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양자 역학이 얽힘과 중첩이라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넓혀, 인간의 뇌가 상상할 수 있는 무한함을 

또 새삼 느끼게 해 주듯이,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음을 넘어선

그 무엇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마지막은 필자의 경험으로 마무리할까 한다.

종종 어떤 사안에 대해서 필자에게 판정을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대다수 분쟁에서 발생된 녹취 증거물에 대한 분석, 감정에 대한 의뢰다.

매 사건의 내용은 다르지만 종국에는 확실하게 분석해서, 실체적 진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말한다.

분석은 과학이지만, 해석은 인간의 몫이고, 그래서 판정할 수는 없고 

일개 전문가로서 어떤 사실관계를 추정 감정 자문 의견 할 뿐이므로,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의뢰인이 해야 한다고 말이다.


과학은 방법을 알려줄 뿐, 왜 그런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석은 판단 도구일 뿐이지, 판정도구는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 曰 ' 너 자신을 알라~' 진실은 여기서부터 시작인 듯하다. 

철학은 학문의 왕이고 언어학은 학문의 여왕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어떤 학문이든 연구의 연구, 질문의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종국에는

철학적 질문과 맞닿아 있으며, 그에 대한 해답을 기술하려면

결국 언어적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또 다른 언어의 탄생을 목도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지...

어릴 때는 국어를, 한 창 때는 영어를, 그리고 지금은 컴퓨터 언어를 배우는 나를 보면

참 맞는 말이다 생각한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과학자 입에서 신(神)이 나오면 그 분야는 이미 끝장난 것이다라고...

그러나 난 이렇게 생각한다.

끝장이 아니라 득도(得道) 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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