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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산책 Aug 19. 2022

훌라후프의 달인

일곱 살 딸아이의 여름방학이 돌아왔다. 며칠 시간을 내어 아이와 함께 친정에 다녀왔다. 나의 친정집은 지어진지 근 45년 된 오래된 주택이다. 결혼 전까지 근 30 년 이상을 이 집에 살았기에 이 공간은 나에겐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하다. 하지만 아이에겐 이 공간이 마치 새로 발견된 우주의 소행성만큼이나 미지의 공간 같나 보다. 아마도 요즘은 이런 옛날 주택을 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일 것 같다. 앞마당에 사는 사마귀나 공벌레, 쿰쿰한 냄새가 나는 지하실, 2층 옥상으로 올라가는 삐걱대는 철제 계단까지, 이 녀석은 외할머니 집에 올 때마다 이곳저곳을 눈을 반짝이며 탐험하고 다닌다. 이번 방문에서 아이의 눈에 가장 띈 것은 예상 밖으로 훌라후프였다. “어? 저기 훌라후프 있다!” 하더니 거실 소파 뒤쪽에 오랫동안 무심히 놓여있던 핑크색 훌라후프를 찾아냈다. 지금은 팔순을 넘기신 친정 엄마가 오십 대 때 뱃살을 뺀다고 쓰셨던 것이니 25년은 족히 넘은 물건이다. 


아이는 호기롭게 시작했다. 훌라후프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한두 번 돌다가 바닥에 툭 떨어지기 일쑤였다. 몇 번을 해봐도 잘되지 않자 외할머니의 비법 레슨이 시작되었다. “일단 두 다리를 어깨너비 정도로 적당히 벌려봐. 그렇지. 후프가 기울어지지 않게 수평이 되게 하고 처음에 아주 힘차게 돌려봐. 아이고 잘하네. 그리고 후프가 떨어질라고 하믄, 허리를 빠르게 돌려서 균형을 찾는 것이여.”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자 잘 돌아가지 않던 후프는 열 번을 넘게 돌아갔다. 


아이는 점점 신이 나서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연습에 열중했다. 그러다 더우면 선풍기로 쪼르르 달려가 바람 한 번 쐬고는 또 다시 훌라후프를 들었다. 연습이 계속될 때마다 돌리는 횟수는 비례해서 늘어났다. 녀석의 이마와 콧잔등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몸은 끈끈이주걱 마냥 땀으로 끈적끈적해져 지나가던 파리도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이제 좀 쉬면 어떠냐고 해도, 돌리는 횟수를 늘려가는 기쁨에 겨워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횟수가 34번, 48번, 69번, … 97번까지 늘어났다. “98, 99, 100, ... 115!” 소리 내어 함께 세어주던 나와 친정엄마는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는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감격스러워 소리치며 나에게 와 안기는 아이의 모습은 마치 2002년 월드컵 때 골을 넣고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기던 박지성 선수의 심정 못지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앞마당으로 뛰어나가 ‘주민들, 저 훌라후프 115개 했어요!’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SBS ‘생활의 달인’에 어린이 훌라후프 달인으로 제보해달라고 진지하게 제안하는 바람에 나와 외할머니는 웃기도 했다. 이날 아이는 잠이 들 때까지 발이 땅에서 붕 떠 있는 듯 신나보였다.


그날 이전까지 내게 친정집의 훌라후프는 그저 거실 배경의 일부였다. 나는 이 집이 익숙해서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 눈엔 맹점처럼 훌라후프가 아예 보이지도 않았었다. 이 오래된 훌라후프가 아이의 눈에 새롭게 발견되고 나서는 전혀 새로운 물건으로 탈바꿈한 느낌이다. 마치 아이가 성취감이라는 감정을 알게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구도 일곱 살 아이에게 훌라후프를 잘하면 좋다고 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스스로 목표를 잡고 성취하고 보람을 느끼는 게 인간의 본성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슬로우가 말한 자아실현의 욕구가 이런 것인가 하고, 녀석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누군가 격려하지 않아도, 조금씩 더 발전하는 자신을 보면서 더 열심히 하고 한 단계 더 뛰어오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갖는 것. 피곤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연습해서 현재를 뛰어넘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있는지도 몰랐던 훌라후프 덕분에 일곱 살 꼬마가 보이지 않는 새로운 계단을 오른 느낌이다. 


모든 배움의 여정이 이번 훌라후프 연습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과가 늘 노력에 정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오래된 훌라후프가 선사한 성취의 기쁨이 녀석의 기억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어, 힘이 드는 순간엔 ‘훌라후프 115번’의 기억을 떠올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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