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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tori Oct 20. 2021

배낭과 캐리어

동남아 배낭여행 - 태국, 후아힌


친구가 있다.

내가 그 친구를 만난 건 12살 때다. 다른 친구들보다 키가 훨씬 크고 머리를 꽉 쪼매서 옆으로 살짝 틀어지게 묶었다.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우린 친구였다. 같은 중학교에 갔고, 다른 고등학교에 갔다. 중학교 때에는 같이 어울렸고, 고등학교 때에는 생일에나 한 번씩 만났다.

그때도 우리는 친구였다.

대학교에 들어갔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서 방학 때나 만나고, 한 번씩 안부를 묻고 명절에만 만났다.

매일 만나지는 않았지만,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여서, 오랜 친구라고 서로 여겼다.


여행 중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2주의 시간을 보내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나 휴가 받았는데, 나 너 있는 데로 가도 돼?

-나는 완전 배낭여행 잔데 괜찮아?

-상관없어. 나는 너한테 무조건 맞출게. 나 때문에 괜히 네 패턴 바꾸고 할 필요 없어.


친구의 캐리어와 나의 배낭들, 그리고 정체모를 나의 패션

배낭과 가방을 앞뒤로 둘러메고 이상한 모자를 뒤집어쓴 나와 크로스백에 캐리어를 끌고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쓴 친구,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 둘이 여행을 시작했다.

17 만에 처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공항에서 만나서 우리는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고 방콕에 도착했다.

그래도 명색이 휴간데, 휴가답게 보내게 해줘야겠다 싶어서 방콕에서 가까운 후아힌으로 향했다.


나름 여행 선배다 싶어서 내가 숙소랑 일정을 정했는데, 숙소가 후아힌 시내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주인아주머니께 연락을 하니 뚝뚝이나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단다. 택시비는 무려 800밧.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름 여행에 도가 텄다고 어깨에 힘주고 ‘나만 따라와’ 했는데, 처음부터 실수투성이인 모습만 보이니 등에서 땀이 나도 모르게 흘렀다.

무더위에 짐을 들고 거리 한가운데 서서 짜증 날 법도 한데 친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스타벅스에서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면서 룰루랄라 하며 사진을 찍는다.


겨우 뚝뚝을 잡아서 흥정을 하고 열심히 달렸다. 나 때문에 고생한 친구 때문에 미안한 마음인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핸드폰 검색하느라 바쁜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신이 났다.

뚝뚝 잡고 흥정할 때 땀이 얼마나 났는지 모른다.



다행히 도착한 숙소는 우리 마음에 쏙 들었다. 사람은 찾아볼 수 없지만 양 옆 길거리에 쪼르르 위치한 예쁜 집들, 그리고 걸어서 5분이면 보이는 해변가. 나름 작은 수영장도 있고, 운이 좋게도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고생시켜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는데, 숙소를 보고 “휴 다행이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깔끔한 화이트톤의 건물과 기분 마저 상쾌하게 만드는 초록내음 가득한 넝굴
발코니에서 보이는 수영장, 투숙객이 우리뿐이라 개인 풀장이었다.



짐을 풀고 스쿠터를 빌리기로 했다.

아직 한 번도 스쿠터를 몰아본 적이 없는데, 친구의 응원을 받아서 스쿠터를 타기로 했다.

엄청 겁에 질려 있는 나에게 계속 뒷자리에 앉아서 “괜찮아 천천히 가. 사람도 없는데. 잘하는데?” 등 칭찬 일색이다.

친구의 응원을 받아서 아무도 없는 도로를 거북이가 기어가듯이 운전을 하며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에서 목도 축이고, 근처 가게에서 물이랑 맥주도 사서 무사히 돌아왔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숙소 수영장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책도 읽으며 놀다가 해가 질 때쯤 바닷가로 갔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해변가

이름은 Khao kalok이다. 바닷물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비치도 깨끗하고 나름 뷰 포인트도 있다.


자리를 잡고 해변가로 뛰어든다. 해가 져서 약간 차가웠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고 12살 그때로 돌아간 듯 물속에서 신나게 놀았다.

친구와 나



아침에 일어나니 친구가 없다.

발코니로 나가보니 혼자 책을 읽으며 수영장에 앉아 있었다.

내려가서 주인아주머니께서 차려주신 조식을 먹고 스쿠터를 타고 무작정 달렸다.

달리다가 소떼가 보여서 스쿠터를 세우고 구경 갔다. 구경을 하다가 한참을 또 달렸다.


뙤약볕에 수영복 걸치고 달리니 땀이 주르륵 흐른다. 동네 한 바퀴 구경하고, 어제 갔던 바닷가로 다시 갔다. 중간에 슈퍼(라고 하기엔 구멍가게)에 들러서 안주와 맥주도 샀다. 산 걸 잔뜩 늘어뜨려 놓고 모래 위에 벌러덩 앉았다.


맥주와 안주를 고르는 건 언제나 친구의 몫, 맛살을 사길래 뭐하나 싶었는데 맥주랑 찰떡궁합이다.


-H야, 나는 괜찮은데 여기에 뭐 할 게 없어서 좀 그렇다. 괜찮아?

-나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은 처음이야. 근데 너무 좋다.

-진짜?

-응. 그냥 수영하고, 책 읽고, 맥주 마시고, 쉬는 게 너무 좋은데?


다행이다.



회사에서 야근하며 고생한 친구가 쓰는 휴가는 특별해야 할 것만 같았다.

회사 다닐 때의 어릴 적 나는 휴가기간 때에 조금 더 구경하고, 발이 불나도록 걸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발바닥을 만지작만지작 마사지를 하며 다음날의 일정을 생각했었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타이트한 일정으로 여행을 하고 피로가 더 쌓였던 나였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휴가를 보내더라.


유럽 사람들처럼 3주, 한 달씩 휴가를 쓰지 못하고, 짧은 휴가 기간 동안 구경을 하려면 4박 5일은 너무 짧다. 시간은 없고, 볼 곳은 많으니 여유롭게 여행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내 친구도 그럴 줄 알았다.

사실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의 답장에도 나는 걱정이 많았다. 배낭여행하는 입장이라 좋은 호텔도 못 가고, 택시 타면 5분 되는 거리를 30분씩 걸어서 가고, 비싼 레스토랑 대신 길거리 꼬치구이 먹으며 돌아다니는 나인데, 친구의 휴가가 아깝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 라는 고민은 쓸데없었다.

빠듯한 일정에 맞춰서 일을 끝내야 하는 압박감 대신에 짜인 일정 없이 흘러가는 하루, 사무실에 앉아서 밤이 오는지도 모르게 모니터를 보는 대신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친구에게는 최고의 휴가였다.


-네가 좋다니까 나도 좋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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