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아이들이 학교에 도시락과 함께 싸 오는 것이 노란 보리물이었다. 시골에서는 마을 지하수와 연결된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게 예사였기에 할머니는 물을 끓여서 마셔야 한다는 걸 몰랐고, 볶은 보리를 넣어 물을 끓일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밥을 다 푸고 난 다음 물을 부어 한차례 끓여 먹는 숭늉이라면 또 모를까, 그것 역시 밥솥에 눌어붙은 밥 한 톨도 그냥 버릴 수 없어서 하는 거였다. 이런 우리 집에서 학교에 보리물을 가져가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점심시간에 노란 보리물을 마시는 친구들의 모습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여름엔 더 했다. 평소에 보리물을 잘 챙겨오지 않던 아이들도 날이 더워지면 보리물을 꽝꽝 얼린 얼음통을 저마다 가져왔다. 우리 자취방에는 한동안 냉장고가 없었다. 더운 여름날이면 얼음집에서 커다란 얼음덩이를 사다가 잘게 부수어서 미숫가루를 타 먹었다. 그날은 차가운 물을 원 없이 실컷 마셨다. 녹으면 다 사라질 운명이라 남은 얼음을 세숫대야에 물과 함께 담고, 거기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종일토록 시원하게 하루를 보냈다.
우리 집에도 마침내 냉장고가 생겼다. 분홍색 작은 냉장고였는데, 우리 자취방에 어울리는 딱 알맞은 크기였다. 냉동과 냉장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냉장고 문을 열면 위쪽에 작은 덮개가 있는데, 그곳이 냉동실이었다.
드디어 얼린 물을 가져갈 수 있겠다는 부푼 마음으로 물을 넣고 얼음이 되길 기다렸다. 이상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물은 좀처럼 얼음으로 바뀌지 않았다. 위쪽에 살짝 살얼음이 끼는 게 전부였다. 꽝꽝 얼린 얼음은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도대체 아이들은 어떻게 그리 단단한 얼음을 얼려오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얼음이 얼기는커녕 작은 냉동실은 걸핏하면 성에가 껴서 안 그래도 작은 냉동실은 점점 더 작아져서 나중엔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쓸모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되는 냉동실의 성에를 떼어내는 일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결국엔 날을 잡아 전원을 뽑고, 녹은 얼음을 여러 차례 걷어내고, 냉장고 안과 바닥에 흐르는 물을 몇 번씩이나 닦아내야 냉동실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분홍 냉장고는 긴 시간 우리와 함께했다.
난 아주 오랫동안 우리 집이 가난한 줄 몰랐다. 내 가난의 기준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고, 입을 옷이 없어서 헐벗고 사는 정도였다. 시골 마을에 가끔씩 들리는 동냥아치 정도가 가난이라고 여겼다. 삼시 세끼 밥 챙겨 먹을 수 있고, 비록 물려받아 입지만 헐벗고 살지도 않으니…… 그래서 매년 학년 초에 쓰는 가정형편에 늘 ‘중’이라고 썼다. 무심코 쓰는 ‘중’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그렇게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가 그 란에 ‘중하’라고 쓰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내 가난의 기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 본 그 집은 절대 ‘중’이 아니었다. 넓은 아파트에(지금처럼 아파트가 흔하지도 않던 시절에), 그 친구 엄마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에는 별의별 게 다 들어가서 한입에 다 베어 물기가 힘들 정도였고, 그 당시에 정말 흔하지 않은 키위까지 들어 있었다. 그런 샌드위치를 먹는 그 친구가 ‘중하’라면 우리 집은 ‘하’임이 명백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그 이후로 난 가정조사서에 언제나 ‘하’라고 썼다.
가난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가난했지만 가난한 줄 모르고 그 시절을 보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