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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동 Jun 15. 2021

엄마의 한글 정복기

“아주, 아주 큰 만두가 익어갑니다. 만두가 익어갈수록……. 아이고, 참 재밌네! 얘기가 참 희한하다! 사자, 호레이(호랑이) 참, 그래…… 짐승들이 다 모있네…….” 

어린아이가 글자를 떼고 처음 책을 읽을 때처럼 떠듬떠듬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손끝에 침까지 찍어내어 책장을 넘기면서, 사이사이 감탄사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칠순이 넘은 엄마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엄마는 가끔 우리 집에 오시면 거실에 앉아서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책들을 꺼내 정말 재미있게 읽습니다. 떠듬떠듬 소리 내어 읽으시다가 “야야, 함 보래. 이건 어예 읽노?” 곁에 있던 손주를 부릅니다. 손주에게 배우고 익히고 나면 또 읽습니다. 연신 “참 재밌네! 거참 재미나네!” 끊임없이 말합니다.

      

엄마는 어린 시절, 그 시대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배울 기회가 없어 한글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냥저냥 귀동냥으로 몇 글자 배운 게 다였고, 그런대로 큰 불편 없이 사신 듯합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들일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우리 가족 모두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어느 정도 성장하여 도시로 나와 바쁜 일상에 쫓기는 우리 형제들보다, 옆에서 늘 함께했던 엄마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한평생 아버지를 따라서 생활하던 엄마였기에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더 눈앞이 캄캄하고 답답했던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곧잘 마실도 나가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되고 나선 마실 나가는 일도 일절 없이 오로지 들일에만 매달렸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어떤 땐 점심도 거르면서…… 마치 일에 한이 맺힌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엄마는 이른 새벽에 눈 뜨기가 무섭게 천수경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아버지 49재를 지냈던 절의 스님을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 얘기 나누던 끝에 천수경 책과 테이프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들일을 하다가 잠깐 들어와 쉴 때도, 밥상머리에서도,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콩을 까면서도…… 엄마는 집 어디서든 천수경을 켰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천수경 소리는 엄마가 잠들기 전까지 내내 우리 집에 울려 퍼졌습니다. 


엄마는 정말 마르고 닳도록 천수경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엄마는 이제 천수경을 다 외워서 테이프 소리를 따라잡아 같이 소리 낼 정도였습니다. 테이프를 듣지 못하는 들일을 할 때마저도 엄마는 혼자서 천수경을 흥얼거리며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엄청 놀라운 것을 발견한 듯했습니다.

“야야! 스님이 준 천수경 책하고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예 좀 비슷한 것 같노?” 

“엄마, 비슷한 게 아니고 똑같다. 책에 있는 내용이 테이프에 그대로 녹음된 기다.”

 “그래!” 

그날부터는 엄마는 테이프 소리에 맞춰 얼마 안 되는 한글 실력으로 천수경 책의 글자를 따라가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형제들이 가끔 집에 갈 때면, “이거는 어예 소리 내노?”라며 책을 내밀어 보였습니다. 

“받침이 두 개 붙어 있는 글자는 참 읽기가 어려버!”

우리가 모처럼 집에 가도 엄마는 천수경 삼매경에 빠져 우리를 덜 반기는 것 같아 서운하다며 우스갯소리도 했지만, 엄마의 그런 모습이 참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엄마가 테이프 소리도 없이 천수경 책을 혼자 술술 다 읽어내는 겁니다. 

“엄마, 언제 글자 이래 다 익힌노?”

“스님이 천수경이 집안에 울려 퍼지면 좋다고 하길래. 내 아침저녁으로 틀어놓고 듣다 보이 다 따라 하게 되고, 책이 글자도 크고, 테이프하고 똑같다 해서 내 따라 읽어 봤제. 읽어보이 재미있대. 그래 그래 했지 뭐…….” 

깜짝 놀란 우리와 달리 엄마는 덤덤하게 그동안의 과정을 쭉 얘기했다. 그래도 스스로 생각해도 좀 자랑스럽고 뿌듯한지 엄마의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한글을 혼자 뗐습니다.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먼저 보내고 힘겨운 시간에 천수경을 만나서 글자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날 버스에서 스님을 우연히 그렇게 만나게 된 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혼자 끙끙대며 견디는 아내가 너무 안쓰럽고 애잔해서……’ 그렇게 이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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