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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동 Sep 02. 2021

그때도 아팠고

한 아이가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당했다. 못된 몇몇 남자아이들은 그 아이 물건에 손이 닿으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깔깔거렸다. 여자아이들은 은근슬쩍 교묘히 그 애와 함께하는 걸 피했다.

그 애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했다. 똑똑했고, 수업 시간에 발표를 도맡아 했다. 나름 승부욕도 강했다. 아침엔 헐레벌떡 등교하는 경우가 잦고, 긴 머리는 빗질이 안 된 채 제멋대로 엉켜 있을 때가 많았다. 어깨에 멘 가방은 언제나 덜 여며져서 속의 물건이 보이는 건 물론이고, 쏟아져 나올 것처럼 아슬아슬할 때도 있었다.

이런 모습이 못된 아이들에게 타깃이 된 듯했다. 그 어떤 것도 누군가를 함부로 할 이유나 조건이 되지 않지만, 못된 짓을 할 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그저 못마땅해서 그냥 한다. 자기들의 행동이 마땅한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익숙해진다. 죄의식조차 없어진다.

한 학년에 2반뿐인 소규모 학교에서 4년을 보낸 이들은 서로를 잘 알았다. 이들의 이런 관계는 꽤 오랫동안 지속된 듯 보였다.   

 



시골에서 대도시로 전학 와서 6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갈 때도 내 눈은 여전히 짝짝이였다. 한쪽은 선명하게 쌍꺼풀진 눈이지만, 다른 한쪽은 눈꺼풀이 아래로 축 처져 눈동자를 반 이상 덮어서 마치 졸린 눈처럼 보였다. 보는 데는 별다른 지장도 없고 특별히 불편하지도 않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봐주지 않았기에 중학교에 들어갈 때 도수 없는 뿔테안경을 꼈다. 안경을 끼면 그게 좀 가려질까 해서였다.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보호해줄 듯 여겨서 그 불편한 안경을 중학교 3년 내내 끼고 다녔다.

    

그것은 내 짝꿍으로부터 시작됐다. 언젠가부터 짝과 앞에 앉은 두 친구가 돌아앉아 얘기하다가 내가 오면 갑자기 뚝 멈췄다. 처음엔 잘 몰랐다. 짝과 다툼이 있지도 않았고, 앞에 앉은 두 친구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중 쌍꺼풀진 커다란 눈이 참 예쁜 아이와는 시시콜콜한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나름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부터는 내가 묻는 말에도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시큰둥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마음에 좀 더 말을 붙이면서 친근함을 표시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내가 오면 하던 얘기를 멈추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셋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키득거리는가 하면, 나를 힐끗거리며 콧방귀까지 끼었다. 아예 대놓고 우리가 널 이렇게 대하니까 좀 알아달라는 식이었다. 의도적이라는 게 다분했다.  

   

하굣길에 만난 친구가 현재 반에서 나의 위치와 그 시작과 주동이 내 짝이라는 얘길 조심스럽게 들려줬다. 차츰차츰 그 무리가 커지고, 그 아이의 입김이 날로 세진다는 게 느껴졌다.

난 연습장을 반으로 가르고 몇 겹으로 접어 작은 공책을 만들었다. ‘마음의 문이라는 표제까지 달았다. 거기에 내 마음과 나의 상황을 담아 글로 썼다. 교무실 담임 선생님의 책상 위에 몰래 올려 두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 자초지종을 확인했다.

얼마 후 나를 다시 부르기 전에 그 몇몇을 불렀던 거 같았다. 그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몰라도 선생님은 나의 말과 그들의 말이 좀 다르다는 듯 나를 나무랐다. 옆에 계신 과학 선생님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며 껄껄 웃었다. 교무실을 나오는데 설움이 복받쳤다. 우르르 몰려갔던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몰라도, 난 정말 거짓 없이 내 이야기를 썼는데……. 난 그날 정성스럽게 만들었던 마음의 문공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어느 날 교실 한쪽에서 내 짝이 눈을 내리뜨는 시늉을 해 보이고, 그걸 보며 깔깔대는 그들의 모습을 봤다. 그래, 너희가 내 앞에서 추켜세울 게 꼴랑 그 두 눈뿐이라는 거지? 두고 보자!’ (그 당시 내 입에서 내뱉어진 말은 이것보다 훨씬 더 격했다. 차마 이곳에 그대로 옮길 수가 없기에……) 난 독해지기로 맘먹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난 아이들 앞에서 나의 그때 이야기를 어렵사리 꺼냈다. 그동안 한 번도 내 스스로 꺼낸 적이 없었던 얘기였다. 아이들 앞에서 즐겁지 않은 내 과거를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얘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난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들이 먼저 울었다. 남자아이들도 눈가가 빨개져서 몰래 눈물을 닦았다.


“난 아직도 그 아이 이름을 기억한다고, ○○○ 평생 기억될 그 이름, 지금도 만나면 묻고 싶다고, 나한테 그때 왜 그랬냐고? 왜?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냐고? 짝짝이 내 눈이 너한테 피해 준 거 있냐고? 어른이 된 후에도 이렇게 마음이 절절한데. 너희들은 절대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누군가에게 한 맺히는 아픔을 줘서는 안 된다고,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교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나의 울음과 아이들의 울음이 뒤섞여 구분이 안 됐다.

그날 이후 아이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솔직히 그들의 세세한 속내나 내막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눈에 띄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 지나간 일이고, 흘러간 세월이라고 생각했다.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때 알았다. 그런 일은 그리 쉬이 잊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날 그렇게 아이들 앞에서 내 얘길 털어놓고, 당부하고 통곡하면서 내 마음도 치유된 걸 느꼈다. 그날 이후로 난 그것에 대해 꽤 담담해졌고, 좀 흐릿해졌다.



      

이 눈으로는 절대 고등학교에 가지 않을 거라고 선포했다. 부모님은 여태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줄 알다가, 내 말에 꽤 놀랐던 거 같았다. 이곳저곳을 다녀보던 중 한 대학병원에서 즉석에서 당장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대학병원은 국립이라 그런지, 여태껏 다닌 다른 병원에 비해 수술비용도 저렴했다. 얼떨결에 수술이 시작됐다.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눈은 마취했지만, 정신은 말짱한 상태여서 수술하는 의사들이 수술과 상관없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수술 후 얼마간 붕대로 덮고 있다가 실밥을 뜯고 눈을 떴을 때의 그 황홀감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내 두 눈의 크기가 똑같았다. 한쪽 눈과 맞추기 위해서 쌍꺼풀도 만들었다. 속으로 말려 들어간 쌍꺼풀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올린 눈이라서 밤에 잘 때 눈이 다 안 감겨 진다고 했지만,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깜깜한 밤인데, 눈을 좀 덜 감고 잔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성인이 된 후에 알았다, 내 병명을. ‘안검하수증’ 눈 근육이 약해서 눈꺼풀을 올리지 못해서 눈을 덮는 현상이라고.


새 학년이 된 어느 날 어린 시절 나의 눈을 닮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의 눈은 양쪽 모두가 그랬다. 덕분에 눈의 크기는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그때의 나처럼 마치 잠이 오는 듯이 반쯤 감겨 있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학부모 상담 날, 그 애의 어머니와 난 눈물을 훔쳤다. 어려서 당장은 수술이 어렵다고 했다. 마음이 여리고 고운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왜 힘든 처지에 처한 이한테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하게 되는 걸까? 그냥 있는 그대로 맘 편하게, 당당하게 지내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 ! !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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