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8.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한 주는 언제든 시작되어왔다.
하지만 늘 살던 시간과는 다른, 이른바 ‘의미’를 지닌 시간의 구간이 출현한 이후 새로이 넘겨가는 시간의 페이지들은 처음 열어 쓰는 노트와도 같다.
노트란 주기성을 띤 공간이고 이 장들의 끝에 뭐가 적힐지는 알 수 없다.
지난주의 적응 기간을 거쳐 또 다른 월요일이 밝은 지금, 지난주까지 쓰던 노트가 다 되어 새로운 노트를 꺼내 들었다. 파랑 줄이 쳐진, 어린 왕자 컨셉을 디자인으로 삼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산 노트.
지난주 토요일, 모리의 병명을 알고서 이후 보살핌의 날들이 시작될 때만 하여도 이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언제까지가 될지 알 수 없는 나날들, 의학적으로는 최소 45일에서 5개월 정도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는 그 시간의 어느 중간에 모리라는 고양이가 지금 모습대로의 생애에 마침표를 찍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단지 얼만큼이 될지 모를 남은 생애에 언제까지고 배 곪지 않고 덜 아프게 그리고 가득한 사랑의 손길 속에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만이 내 숙제로 남겨졌을 뿐.
이 상황에서 내게 위안이 될 첫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올해로 19세인 모리는 이미 이 나이로 고양이로서의 천수를 살았다고도 볼 수 있어서, 암 발병이라는 생애 가속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영영 길게 내 옆에 머물 수는 없었다고. 겉으로 건강해 보이던 모습에 비추어 앞으로 2년 혹은 길면 3년 정도로 기대하던 것에서 이제는 떠나는 날이 조금 앞당겨져 고지되었을 뿐이라고.
단지, 앞으로 몸이 변형되면서 고통이 올 일, 그런 모리를 조마조마 지켜볼 일이 걱정이었다.
모리 간병일기를 적어가는 노트
그리고 무엇보다 모리에 대한 선고가 내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내가 고양이들과 함게 한 지난 20여 년의 날들이 이윽고 끝나간다는 것이 뚜렷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나의 한 시대 폐막의 알림음처럼 여겨졌다.
이 사실이 마음 깊은 층을 흔들어 파고들면서 잠시 견딜 수 없는 기분을 일으켜 눈물을 터뜨리곤 하다가는, 이런 나날들에 우연히 적어 내려간 ‘고양이 일기’가 내게 적지 않은 위안이자 그다음 시간을 디딜 지팡이가 되어갔다. 그래서 고양이들과 관계되어 떠오르는 상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틈틈이 적고 있다.
사료를 갈아서 한 번 더 체에 거르고, 가루약도 개어 이것들을 차례차례로 주사기를 통해 관으로 흘려 넣어주는 과정을 겨우 두 번쯤 반복할세라 어느새 이것이 하나의 의식처럼 여겨졌다. 설명을 들을 때만 해도 그저 막연히 번거로워 보이는 일과였지만 막상 해보니 습관처럼 밥그릇에 사료를 쏟아줄 때와 달리 좀 더 공을 들여 먹여주는 이 일이 곧 즐거워졌다.
이렇게 공을 들여봤자 죽은 건 마찬가지다. 결론들의 세계에선 그러하다. 이 세상에서 반짝이던 개개의 사실들이란 결론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허망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결국은 죽게 되어 있다면 구태여 왜 기를 써가며 애써 살아가는가? 가 이 지구의 존재로 종사해온 그 모두의 울부짖음이었을 거다.
인간의 날들을 사는 동안 나 또한 꾸준히 그 울음을 집어삼키고 다시 길어 올리는 되새김질을 거듭해왔다. 뭐라 말해도 무를 수 없이 서러운 우리, 살아있는 존재들.
그런데 나의 모리는 마치 작은 그리스도처럼, 생을 마쳐가면서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먹이고 섬기고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허망하지 않다고. 그 순간에 서로를 머무를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재미이고 보람이라고.
또한 모리는 자기 병의 지연되는 경과를 통해 내게 글을 쓸만한 마음의 기후와 틈까지를 내어주었다.
샴푸와 알약을 모두 소진하고서 그 통을 버릴 때면 후련해진다. 이런 소비를 통해 무얼 이룬 것도 없건만, 소비 행위의 작은 일단락 자체가 이상한 보람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장까지 노트를 채워 쓰고서 새로운 노트로는 어떤 걸 쓸까 고를 즈음이 오면 역시 설렌다.
헌 것을 버리고 새것을 여는 재미. 일상의 갖은 반복이 가져다주는 막연함은, 주기성을 가진 더 작은 단위로 쪼개져 두루마리 휴지의 절취선 같은 간막이 형성될 때, 견딜만한 이상의 리듬이 된다. 그리고 리듬은 일정한 간격 안에서 거듭되며 늘 예민하고 활달하게 변주된다. 삶 속에 깃들인 이 예측불허의 변주는, 나무토막처럼 단조롭고 뻔하다시피 한 결론적 끝에 항상 맞서 있다.
p.s. 이 새로운 노트는 낱장으로 뜯어낼 수 있어서,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3. 9.
하루 이틀 사이 모리는 자주 침을 흘린다. 입이 계속 변형되고 있어서 침의 흐름이 잘 제어되지 않는다. 입으로 먹는 것도 더욱 불편해졌다. 관을 통한 사료 공급이 정말 다행스럽다. 이런 과정을 불편해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었던 처음의 생각은 기우였다. 사료를 넣어주는 시간이 되면 그릉그릉 소리를 낸다. 비록 입으로 먹지 않은 거라 해도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흘러가고 배고픔이 사라지는 느낌을, 고양이는 받는 걸까?
지금 모리는 의자의 푹신한 방석 위에서 물방울 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편안해 보인다. 오늘은 고양이 치유 음악 대신 쇼팽을 틀어주었는데, 어느 치유 음악 못지 않다. 이별곡이 흐른다. 쇼팽의 이별곡과 함께하면 이별도 삭막하지 않고 한껏 부드러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글을 흘겨 쓰고는 곧 도수치료를 받으러 가야 한다. 나의 힐링 시간이 될. 도수치료를 받는 와중에, 요새 내가 고양이를 돌보는 이야기 그리고 바로 이 물리치료사 분이 추천해주어서 보게 된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에 대해 대화하게 될 것이다.
봄은 발바닥부터 온다
3.12.
집에선 실내화를 신는다. 바깥세상에선 꽃들이 번호표를 들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 내 발바닥에선 땀이 자주 난다. 실내화를 잠시 벗고 발을 말리곤 한다. 시간의 흐름이 야기하는 이런 작은 표지도 이제 마음 쓰인다. 나는 이케아에서 산 발판에 앉아 이 글을 쓰고, 모리는 내 뒤의 편한 의자에 누워 있다. 가끔 돌아 모리를 쓰다듬는다.
정말이지 세상일이란 알 수 없다. 눈을 뜨고 감는 모든 사이 그리고 수면 때처럼 죽 감은 채 누워 있는 시간에조차 우리는 운명의 두 손에 저글링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운명에는 손이 두 개만 달렸을까?
이 노트를 살 때만 하여도 여기에 무슨 이야기를 적게 될지 작정도 결심도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언제 적게 될지 모를 미지의 이야기에 대한, 그것을 써나갈 내 손을 이끌어갈 힘에 대한 막연한 설렘만이 감돌았다.
지난겨울이 시작될 때만 해도 올해 따라 그토록 자주 눈이 내려주어 우리를 기쁘게 해줄 줄 몰랐듯, 앞으로 몇 년은 더 살 수도 있을 것처럼 눈이 초롱초롱한, 고양이 일반에게 붙여지는 애칭 ‘나비’가 날개 달린 나비라고 느끼게 해줄 듯 가볍고 탄력적인 점프력을 가졌던, 아직도 아가의 얼굴을 한 모리에게 이 겨울 끝에 닥쳐올 일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청천벽력은 예고가 없었을뿐더러 소리소문없이 사뿐했다. 하여 알아챌 겨를이 없었고, 발견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지금의 질병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이 노트에 모리의 일 그리고 나의 고양이들에 대해 적게 될 줄 몰랐다. 어디서 왔을지 모르게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어느덧 차례차례 나타나 내 옆에 머물러온 고양이들과의 이야기를. 어린 왕자와 여우가 그려진 노트 위에 적고 있노라면, 고양이들이 이야기 속의 여우 같다.
‘이 아이들하고는 처음부터 한 세트를 이룬 영혼이 아니었을까?’ 이 아이들과 한참을 지내고선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하고의 인연만큼이나 고양이들과의 인연도 진하고 붉은 실로 묶여 있는 것만 같다.
그 실은 사람들하고의 것보다 뚜렷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처럼 어쩌다 서로를 저버리는 일이란 통 일어나지 않으므로. 반려동물을 내다 버리는 막돼먹은 싸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동물과의 인연이란 아름답게도 같은 실을 순히 부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