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근심하는 날이 하루라도 길었으면

by 래연



모리는 막내다

3. 13.


숨은 그림 찾기 책을 마쳤다. 새로 주문하려고 한다.


관으로 사료를 공급해준 지 이주가 지났다. 주사기 4개씩 하루에 다섯 번 먹이다가, 꼬박 매번 4개씩은 좀 과한가 싶어 며칠 전부터는 3개와 4개를 교대로 먹인다.

오늘 또 병원에 간다.

토요일 아침이다. 긴장이 힘줄들을 잡아당기는 나날들이 계속되면서 온몸에 피로가 쌓였다. 자고 나도 일정량의 피로가 남아, 이 묵은 피로 위로 그다음 날의 새로운 피로가 쌓여가며 뒤섞인다.

도움이 될까 싶어 발포 비타민을 녹여 마시기도 하고 포도 주스도 사 왔다. 페레로로쉐 초콜릿도 자주 까먹곤 한다.



이제는 돌보는 과정이 적응되어 처음처럼 어려운 것도 아님에도 이 끊이지 않는 긴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아마도 무의식. 거짓말할 줄 모르는 무의식의 반응이리라. 겉으로는 타협하고 받아들인 것 같은, 닥쳐온 사건을 아직도 이질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맏이 때 하고는 경과가 달라서일 것이다. 맏이는 나이가 들면서 점진적으로 쇠약해 갔기에 그에 맞추어 내 마음도 준비되어 간 셈이다. 그 죽음은 주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고가 뚜렷한, 친절하고 일반적인 죽음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갔다.


하지만 모리는 이 커져만 가는 종양만 아니라면 아직도 아가 같은 모습이다. 곧 죽을 고양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식욕도 여전하고 눈빛도 또랑또랑하다. 저 딱딱한 종양이 흐물흐물 액체처럼 녹아서 주사기 같은 것으로 뽑아내는 상상이 자꾸만 든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종양.

이성理性의 입장에서는 모리에게 닥친 선고를 받아들여 어느 정도 체념했지만, 살아있는 것에 살아있는 것이 반응하는 느낌은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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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동물들은 우리 인간과는 다른 직감의 세계 속에 사는지 반응이 다른 듯도 하다. 지난번 맏이 때, 맏이의 마지막 이틀 동안, 남은 두 마리는 맏이의 징후가 뚜렷해지자 맏이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냄새를 맡더니 피해버렸다. 평소 같지 않은 외면이었다. 이미 죽음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맏이와 남은 고양이들은 서로 달라진 영역을 갈라 지키듯 했다. 산 고양이들은 그런 방식으로 죽음으로부터 빗겨 서 있었다. 이전에 서로 나누던 그루밍이나 아는 척하기 등 일상의 제스처를 모두 접은 채.


지금은 하루하루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직은 로리가 모리를 핥아주기는 하지만.

나의 세 마리는 모두 천수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막내 모리는 19살이고, 둘째 로리는 20살이 되었다. 작년에 간 맏이는 당시 20살이었다.

맏이는 제롬이라는 이름 외에 수많은 애칭으로 불렸다. 롬냥이, 고흐냥이, 흐냥이, 흐라소니 등. 녀석이 말년에 이른 어느 날 나는 말했다. “이만큼 살았으면 너는 고앙이 계의 신령님인 거야.” 이로부터 녀석을 프랑스어의 정관사 le를 붙여 ‘르 고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말년의 르 고양이가 쇠약해 가는 과정은 전체적 하향 곡선을 그려가는 가운데 한시적으로는 잠시 더 건강해진 듯 보이기도 했다. 불이 꺼져가다가 남은 불씨가 다시 지펴지기라도 하듯이. 더 잘 먹고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작년 3월쯤엔 정말 곧 갈 것처럼 보였었다. 대소변 통제가 가끔 안 되면서 이불 위나 방바닥 위에 지리기도 했다.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몸만 껍데기처럼 여기 남겨 두고 정신이나 영혼은 어디 아득히 먼 데로 빠져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열흘 안에라도 죽을 것처럼 보이던 르 고양이는 이후 잠시 활력을 되찾은 듯 이전처럼 있는 한껏 세차게 울었고(본래 울음소리가 이웃에게 민폐가 갈까 걱정이 될 정도였었다), 사료도 오독오독 왕성하게 씹어댔다. 이대로 한동안은 더 살 수도 있겠거니 했다. 그렇게 두세 달을 더 살았다. 그리고 이 기간을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으로 받아들였다. 준비가 덜 된 나를 위하여 제롬이가 있는 힘을 다해 좀 더 살아준 거라고, 그렇게 이별을 늦춰준 거라고.




특히 맏이는 여느 귀여운 고양이하고도 달리 유독 ‘사람의 마음을 가진 고양이’였기에 더욱 그렇게 믿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녔다. 세 마리 중 가장 내 마음의 비중이 많이 실려 있던 고양이인 자기의 죽음을 좀 더 수월하게 내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죽음을 잘게 잘게 씹어 죽처럼 만들며 최후의 시간을 늦추었던 것만 같았다.

그러다 르 고양이가 떠나자마자 갑자기 모리는 르 고양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민들레, 씀바귀, 다음 주에 먹을 봄나물의 이름들을 적어본다

3. 14.


아침밥을 먹고 난 모리는 고개를 한쪽으로 떨군 채 자고 있다. 종양의 무게로 인해 무거워진 쪽의 반대 방향으로 얼굴을 기울이고서. 무게를 달리 견디는 방식처럼 보인다.

내가 잠을 떨고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 나오면 모리는 다가와 힘차게 울며 아침을 조른다. 아이가 병에 걸린 후 이 모습은 더욱 반갑다. 아침을 조른다는 그 흔한 일상성!

오늘 아침엔 원래 주식이었던 닭고기 캔을 대신하여 요새 새로 갈아 걸러 만드는 액체를 접시에 부어주었더니 말끔히 싹싹 핥아먹었다. 이렇게 핥아먹은 양만도 주사기 한 개 분량은 되었다. 아프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는 입으로 먹지 못하지만, 혀로 핥는 데엔 지장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먹는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하루 두 번은 이렇게 먹이기로 한다.



모리는 남은 날들의 n분의 일을 살았고, 나도 마찬가지다. 남은 시간이 얼마간이건 n분의 일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니, 이때 사용되는 n이라는 알파벳이 신비해진다.

오늘은 고양이 치유 음악 대신에, 지난겨울의 배경음악처럼 자주 흘려놓았던 스노우 재즈를 틀어놓았다. 모리와 더불어 무사안일했고 그저 포근하기만 했던 겨울날들을 잠시 다시 불러들여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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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의 오손도손 하던 한때





거실 소파 옆 해먹 안에서 이 글을 쓴다. 옆의 소파 위에는 또 다른 한 마리, 나의 삼색 고양이가 새근새근 자다가 가끔 신음을 내어 뱉곤 한다. 겨울의 초엽 거실 창가로 옮겨 놓았던 이 해먹은 완연히 따듯해질 어떤 날에 다시 베란다로 옮겨질 거다.

내게는 긴요한 기록이 되는 이 글들을 블로그에도 남겨놓을까 하다가도, 아무래도 아픈 이야기를 누군가 읽고서 잠시라도 아파질까 봐, 봐서 가끔만 올리게 된다.


하지만 막상 겪는 당사자는 어쨌든 적응이 되는 법이다. 죽음의 임박도 처음에만 치명적 사건으로 고지될 뿐, 이후는 필요한 보살핌이 그냥 생활이 되어간다. 리듬조차 생겨난다. 이 일이 발발하기 전 막막한 권태에 점령되어 리듬을 불러오기도 힘들었던 날들의 겉으로만 애매한 평화에 비하면 지금의 날들이란, 내 입장에선 오히려 보다더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시간이다.



단지 많이 피로하다. 한약을 지어 먹어야겠다. 창밖을 흘긋 내다보면서, 다음 주에 해먹을 봄나물의 이름들을 적어본다. 민들레, 씀바귀, 방풍나물......

어제 병원에선 모리의 피검사 결과, 인 수치가 올라가 있었다. 인 흡착제를 사료와 섞어 먹이기로 했다.

어차피 죽을 거 왜 이거저거 해주며 공을 들여요? 허망하지 않아요? 라고 누가 물어오거나 말을 꺼내지는 않아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질문을 고스란히 되돌려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당신은요? 어차피 죽을 건데 왜 그리 열심히 살아요? 집은요, 가구는요, 차는요, 아이들은요, 적금은요, 부동산은요, 각종 일기와 그림일기는요?



지금 이 글을 쓰는 노트가 시작되는 앞장엔 스티커로 가득한 한 페이지가 딸려 있다. 어린 왕자 컨셉의 스티커들이 지금 보니 우표 모양으로 되어있다. 작년 봄 내게 화분을 보내주었던 분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화분 중 하나는 끝내 살리지 못했고, 남은 테이블 야자도 한 잎 돋아나면 다른 잎 시들고 하기를 거듭하며 아직 연명만 하고 있다. 화분 이야기는 슬쩍 빼고서 편지를 써야겠다.

다음 주엔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체국 근처의 생기 넘치는 봄 시장에서 민들레와 씀바귀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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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버무리

3. 28.


지난주에 산 쑥으로 쑥버무리를 해 먹었다.

급성 후두염이 아직도여서 곧 약도 챙겨 먹어야 한다.

꽃이 피는 즈음은 늘 이렇게 날씨가 심술궂었던가? 올해는 유독 신경 쓸 일이 많아 몸이 약해진 나머지 날씨의 파장을 더 세게 느끼는 것인가?

어제는 비에 바람에, 유독했다.


모리의 턱 상황이 악화되면서 침이 통제가 안 되어 늘상 줄줄 흐르고, 자꾸 입안을 이빨로 찍든지 해서 피까지 자주 흐른다. 이걸 늘 닦아주고 있지만, 그만큼 방석 커버와 인형도 자주 빨아주어야 한다. 이틀에 한 번 빨아주다가, 주말인 어제는 여분의 덮개와 인형을 더 사기로 했다.

방석 위에 덮어서 손쉽게 자주 빨아줄 만한 면 덮개를 시장에서 두 개 사고.



그런데 인형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15Ccm 남짓한 물방울 인형 정도의 크기와 질감을 가진 인형을 찾아서 두 군데의 문방구와 다이소, 홈플러스의 완구 코너 등을 헤매었다. 꼭 어제 사지 않아도 되는 것이건만 오기라도 난 듯이 우산을 받쳐든채 찾아다녔다. 돌아다닌 통에 신발이 다 젖어서 깔창을 꺼내놓고 말리고 있다.

어디선가 자주 본 듯도 한, 작고 흔해 보이는 그것이, 막상 필요해져서 찾기 시작하자 어디서고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에서 찾아 주문했다.

물방울 인형은 내가 화장품 사은품으로 올리브 영에서 받은 것이었다.

이게 이렇게 요긴할 줄 몰랐다. 아프고 불편한 날들에 저렇게 딱 맞는 걸 주게 된 것이.

모리는 저 인형을 즐거이 베거나 안거나 그 위에 다리를 올려놓거나 한다.



새벽녘에 모리가 다가와, 자고 있던 나를 깨우기도 한다. 턱을 닦아주고선 안고 쓰다듬어주고 나면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잔다.

이럴 때마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혹 많이 아픈 게 아닐까 싶다.

모리 발병 이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지내다 보니 줄곧 긴장이 이어진다. 이런 날들에 몸이 버겁다가도, 더이상 이럴 필요가 없어질 미래의 날들에서 바라보면 지금이 무척 그리우리라 하면서 지금을 한 번 더 머금는다. 아픈 모습으로나마 바로 눈앞에 살아있고, 움직이고,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미비하지만 서로 대화 비슷한 걸 나눈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