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
벚꽃 접시
작은 접시 속에서마저
벚꽃잎이 스러진다
물에 띄워 주어 고맙다 달싹이지
못할 입술을 끄덕이지
못할 고개를
손가락을 지니지 못하여
마지못해 선한 표정은
검은 건반 하나 내리누르지 못하는
그간 나날들이 흘러 새달이 되었다.
스트레스와 환절기가 겹치며 좀 앓았다. 급성 후두염과 알레르기 비염으로 3월의 남은 절반을 보내고 앉았다.
그러다 맞은 내 생일. 생일에 가까워가면서 나는 삶 속에 실현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점점 더 놓아갔다. 미미한 감각만 남겨놓고서 떠돌고 맛보며 소일하고 싶어졌다. 저녁마다는 넷플릭스 폐인으로 부활하곤 했다.
3월에 지인에게 쓰려던 편지는 초안을 쓰다 폐기했고 새로 써 부칠 작정이다. 언젠가 그녀가 프루스트 읽기에 몰두한다던 말이 떠올라 프루스트 읽기가 어땠냐고 물으려 한다.
나빠진 눈을 아껴 조금씩 읽고 싶은 작가들이 아직은 있다.
글을 사랑하지만, 책을 신봉하지는 않는다. 글쓰기에 대해 과열된 찬미도 석연찮지만, 글쓰기의 쓸모는 부정할 수 없다. 거의 아무것도 제멋대로일 수 없는 현실 속에, 문자를 빌린 글쓰기란 그나마 드물게도 자기를 느낄 수 있는 과정이다. ‘너는 못났고, 얼마든지 고쳐져야만 해!’라고 매 순간 끊임없이 못을 박아온 세계를 내 안으로부터 일일이 뽑아내기도 버거운 나머지, 주입된 자아상을 그냥 받아들여 커다랗게 비춰 보이는 허물들을 염오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나날들 속, 글쓰기가 어쨌든 위로가 되는 건 틀림없다.
아침엔, 아직도 모리가 살아서 내 생일을 깨워주었다. 모리와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다.
거실 옆 커다란 유리창엔 빗방울이 가득하다. 안경 쓴 눈을 옆으로 하면, 저마다의 속도로 창을 미끄러지는 물방울들. 기억 작용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양, 개중에는 무슨 생각이라도 더듬듯 더 천천히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있다.
4. 4.
어제는 참으로 잔잔하고 즐거운 하루였다.
그래서 잊을 뻔한 하나의 해프닝.
케이크를 찾아서 지하철을 타고 왔는데, 직원이 상자 어딘가에 붙여 놓았던 초 꾸러미가 빗줄기 속 어딘가에 떨어졌는지, 꽂으려는 찰나에 보이지 않았다. 케이크에 초를 올리지 않은 생일이 되었다.
4. 9.
새벽부터 로리가 마구 울었다.
고양이들이 마구 울 때가 있다. 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별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우는 것이다. 이럴 때는 보통 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 운다. 내가 일어나 앉으면 울기를 뚝 그친다. 마치 깨워야 할 중대 사안이라도 있었다는 듯. 내가 나의 하루에 긴급하게 출석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듯.
그 중대 사안이 뭔지가 훤히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일은 아니다. 우리 눈엔 보이지 않으나 고양이들에게는 감지되는 세계에서 무언가 조정되어야 할 것이 있을 때 그들은 힘을 다하여 운다.
비가시계의 수호자들.
내 세 마리 고양이가 동시에 우는 것은 아니다. 맏이가 살아있었을 때 그건 맏이 몫이었다. 그 아이는 정말 생애 내내 미친 듯이 울어댔다. 남이 들으면 고양이가 아프거나 학대라도 받는다고 여길 만큼.
맏이가 가자마자 이번에는 모리가 맏이와 비슷한 톤을 내어가며 울었다.
모리가 아프게 되자 이제는 둘째인 로리가 운다.
오늘은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고 시야는 흐렸다. 지금도 머리는 무겁고 온몸을 무언가에게 두들겨 맞은 듯이 아프다. 모리 아침밥도 겨우 주었다. 고양이 진정 음악을 틀어놓고 밥을 먹이고서 나도 계속하여 이 음악을 듣고 있다.
세상의 파장이 극 이상하다.
스무 살 이전, 나의 세계관에 밝음이라곤 없었다. 가족은 지옥이었고, 학교란 부조리했다. 성장기를 그렇게 보내고 나자, 이 지구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믿었고, 종말이 멀지 않다 여겼다. 그 당시 지구 종말론은 여러 번 대세를 이루었다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아무튼 새 세기라 그런지 조금은 주춤해 보인다.
사람들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도무지 제정신인 사람이 없어 보였다. 지하철을 타면 그 안의 사람들에게서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죽어가는 세상을 억지로 돌리고 있는 형국으로 보였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상상하며 헤엄치고들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삶의 시간은 한참 남았고 생애란 길다 보니, 어쩌다 서른을 넘기고 나자, 이렇게 느껴지는 현상 전체를 모두 내 탓으로 돌리게 되었다. 내가 어딘가 이상하거나 잘못된 나머지, 어쩌면 멀쩡한 세상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갓 부적응자 아닌가, 조금이라도 남 비슷한 척이라도 해야겠다, 하는 모드로 이동하였다. 이후의 시간은 말하자면 자아와 세상의 화해 내지 조화 쪽으로 움직였다. 나만 애써서 남 비슷하게 되면 그럭저럭 살아지지 않을까가 약간의 희망인 양.
중간에 영화 <매트릭스>도 나왔다.
시간이 또 흐르고.
살며 만나는 갖은 진상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이 남은 시간과 동시대 인류에 대한 사랑 비슷한 걸 면면히 끌어안아 왔지만.
삶의 시간이 길다 보니 연명의 필요 차원에서 일종의 믿음이 필요한가 하다가 지금은...
내게서 다시 스무 살 이전의 세계관이 부활하는 걸 느낀다.
일제 치하도 전쟁 시대도 지났건만, 마치 사람들에게 외계의 존재들이라도 이식된 듯, 사람들이 뭔가에 사로잡혀 보인다. 딱 그렇게 보인다.
접시에 담아둔 꽃이 속히 시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