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꾸러기 덴스 Apr 15. 2019

DNA 발견의 숨은 이야기

로잘린드 플랭클린과 노벨상

1953년 4월 25일 자 네이처 (Nature)지.



이 날은 20세기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이 발표된 날이다.
문제의 논문에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생명체의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인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 형태임을 제안하였다. 왓슨과 크릭, 그리고 이들의 동료인 윌킨스는 이 연구의 업적으로 1962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욋슨의 이중구조(책 표지) 이미지


1968년에는 당시의 긴박감 넘치는 경쟁을 흥미롭게 묘사한 왓슨의 ‘이중나선’이라는 책이 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1950년대 초 DNA 구조 규명을 둘러싼 치열한 경주는 왓슨과 크릭, 윌킨스의 영국 캠브리지 대학팀과 노벨상 수상자였던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 박사 사이의 각축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아주 중요한 과학자 한 명이 간과되어 왔다.


 영국 킹스 칼리지에서 윌킨스와 같이 연구한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다.

그녀는 전문적인 X-ray 회절 기술을 DNA 구조에 적용하고 물리 화학적 배경을 써서 두 가지 형태의 DNA가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즉 높은 습도에서는 젖은 DNA 섬유는 길고 가늘며 건조되면 짧고 굵어진다. 즉 시료는 만일 습도가 변하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뀌었고 프랭클린은 이를 각각 DNA “B형"과 DNA "A형"이라고 명명하였다. DNA에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낸 후 프랭클린은 매우 독창적이고 힘든 방법을 개발하여 두 형태의 분리에 성공한다. 그녀는 처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회절 패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한 DNA 결정을 얻었다. B형 X-선 사진은 이중나선(Double helix)을 암시하는 흐릿한 X자 모양을 나타내었다. 이 사진 한 장이 DNA의 실마리를 푸는 역사적인 단서가 된다. 왓슨과 크릭은 이 실마리를 바탕으로 DNA 구조를 드러내는 논문을 1953년 세상에 내놓게 된다.


PBS 교육 다큐멘터리 <DNA; 사진 51의 비밀>를 보면 DNA의 구조를 밝히는 경주의 최종 승리자는 왓슨과 크릭 그리고 윌킨스이지만 로잘린드의 결정적인 이중나선구조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그런 업적을 달성했을지는 의문이다. 워낙 중요한 자료였기 때문에 만약 폴링이 먼저 그녀의 데이터를 접했더라면 노벨상의 영예는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라고 믿는 이가 많다.


 문제는 로잘린드의 데이터가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왓슨과 크릭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왓슨과 크릭은 그녀의 데이터가 뭘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챘고 이를 기반으로 DNA모델의 완성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 유명한 1953년 논문에는 로잘린드의 이름이 실리지 않았다. 벌써 60여 년 전 일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연구 선점을 놓고 얼마나 심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50년대의 성차별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동료들도, 노벨상의 영예도 그녀를 외면하였지만 로잘린드는 묵묵히 연구를 계속해 바이러스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녀가 대인관계에 미숙했던 것은 당시 남성 중심의 연구풍토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른다. 1968년에 출간된 ‘이중나선’에서 왓슨은 로잘린드를 까다롭고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으로 묘사했다. 로잘린드는 이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겨우 37세였던 1958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플랭클린의 오랜 친구이자 잘 알려진 신문기자인  앤 소여(Anne Sayre)가 왓슨의 '이중나선' 책에 반발하여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Rosalind Frankline and DNA)'라는 제목으로 프랭클린의 전기를 쓴다. 이 책으로 인해 사람들은 비로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프랭클린의 공적을 알게 되었고 특히 부당한 대우를 받은 히로인으로서 여성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여성들은 프랭클린이 노벨상을 도둑맞았다고 분노하였고 남자들끼리의 요새(要塞) 속에서 여성들을 왕따 시키는 성차별에 대하여 공론을 일으켜 그녀의 이야기는 책으로 영화로 연극으로 무대에 오른다.


 어느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과학계에도 슈퍼스타가 있는가 하면 큰 업적을 남기고도 그늘에 가려져 버린 이도 많다. 만약 폴링이 비자를 발급받아 (당시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여 비자발급이 금지되었다) 학회에서 프랭클린을 만났더라면 또는 왓슨과 함께 공동연구를 했더라면 DNA 대한 연구는 획기적으로 급진전되었을 것이다.

경쟁보다는 협업이 훨씬 효율적일 때가 있다. 특히 전문분야에서 인사이트를 얻는 요즘 같은 융합시대에선 더욱더 그렇다. 무엇(What)을 하는가 보다 왜(Why)하는가 하는 질문에 늘 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적어도 과학자라면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