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 30분경, 하나의 기사가 보도됐다.《윤석열 "배운 게 없고 가난한 사람은 자유의 필요성 몰라"》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나왔다.
나는 재빨리 정치면 톱으로 교체했다. 얼마 전, 이재명이 전두환 삼저 호황 발언을 두고 치적을 치켜세웠다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발언의 맥락이 공개되면서 논란은 일축되었으나, 그전까지 언론사에서 앞 다투어 보도했다. 윤석열 기사도 화제성면에서 이재명과 궤를 같이 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언론사 홈페이지를 클릭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영역인 '인덱스'에는 톱으로 걸리지 않았다. 주요 기사, 그것도 스크롤을 한 번 내려야 보이는 곳에 걸렸다. 클릭 수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언론사에서 이걸 포기하나 싶었다. 편집은 편집자의 재량이므로, 인덱스 담당 기자 나름의 가치 판단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15분 남짓 지났을까, 동료에게서 카톡이 날아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이가 없었다. 인덱스를 확인하니 표현은 《 자유의 본질은 교육, 경제가 있어야 존재》로 순화돼 있었다. 전화해서 항의한 사람도, 그걸 바꾼 부장도, 나에게 참고하라고 연락한 동료에게도 화가 났다.타 언론사는 여전히 그 제목 그대로였다.
사실 동료에게 화낼 필요는 없다. 정치면 톱을 바꾸라고 지시가 내려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멀어 나에게 바꾸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으로 착각해 정치면까지 수정하였다. 괘씸한 나머지, 어떻게든 반항할 생각만 맴돌았다. 그래서 내가 편집한 워딩이 아니라 민주당과 정의당이 분노한 반응을 실은 기사 2개를 연이어 올렸다. 그리고 민주당발 기사의 원래 제목이 '자유 뭔지 몰라'에서 '빈자 자유 몰라'로 수정해 몸으로 뿜지 못한 분노를 소극적으로 자아냈다.
윤석열 발언의 진위 여부 등 모든 사실관계를 떠나서 기자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편집권 침해다.
이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할 것이 있다. 동료의 말이 사실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표가 편집부에 직접 전화해 워딩을 수정하라고 한 경위가 사실이라면, 이는 부당하다. 언론이라면, 경영자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사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특정 이익에 따라 왜곡되지 않은 팩트를 전달하는 의무, 즉 공익성을 추구하는 기관이라는 점과 수익을 내야 하는 사업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항상 공익성과 수익성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경영자의 편집 간섭은 이 균형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심지어 '불편부당한 정보 유통'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우리 언론사라면 경영자의 관점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이익에도 보도가 좌우되어선 안된다. 경영자의 시각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객관성을 담보할 것이라면 편집권을 가진 집단 안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지, 경영자의 간섭으로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경영자의 편집권 침해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고 원천적으로 막을 수도 없다. 내가 더 화나는 지점은 편집부장의 반응이다.
카톡을 받기 바로 전, 부장의 입에서 "아 편향된 것 같네요"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맥락을 맞춰보면, 부장은 이의 없이 수화기 너머 인물의 생각에 동조한 것이 분명하다. 편집은 편집자의 가치판단에 따라 재량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부장 역시 전화 상의 아무개와 가치판단을 같이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분노는 해야 하지 않나? 15분이라는 시간 동안 원제를 놔둔 것을 보면 부장 스스로도 이상할 것 없는 제목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필적으로나마 본인이 동조한 판단을 누군가 부정하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는 모습이실망스러웠다. 내가 평소 상상하고 기대한 편집부장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기사 삭제 요청은 자주 있다. 하지만 내용은 그대로 둔 채 제목만 갈아끼우는 요청은 낯설었다. 그 결과, 리드와 제목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물론 나의 전제가 틀렸을 수 있다. 수화기 너머의 아무개가 대표라는 것은 동료의 주장이고, 동료도 추정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홈페이지를 계속 모니터링하면서, 정치부장까지 시켜 기사의 원제까지 수정토록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국장이 있다.
국장의 경우라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편집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논쟁 과정 없이 톱다운 방식으로 기사 수정이 이뤄지는 사내 구조와 그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기성 언론인들의 문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편집부의 권한 존중을 덜하고 설득 없는 과정으로 제목을 수정시키는 국장이라면 그것 또한 문제다. 언론에서 논쟁을 빼면 다른 회사랑 무엇이 다를까. 그저 글을 파는 상점에 불과하다.
애초에 국장이 그런 식으로 제목을 수정하라고 한 전력이 없다. 수정을 지시해도 대부분 대면으로 이야기했다. 따라서 무게는 대표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기에 화를 섣불리 겨냥해선 곤란하다. 그래서 여태 여러 갈래를 따져보았다.
남은 문제가 있다. 해당 기사의 원래 제목이 왜곡 없이 잘 쓰인 것일까?
장담할 순 없다. 원제가 본문의 내용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느냐거나 가장 잘 담아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러나원제는 사실관계를 함유하고 있다.
'사실관계'임을 주목하고 싶다. '사실'과는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후자에 없는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윤석열 발언의 맥락을 따졌을 때, 원제는 사실을 띠고 있다. 실제로 윤석열은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은 자유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이재명 때와 비교해서 보면 의미가 선명해진다. 이재명이 전두환의 공을 이야기한 것이 사실일까? 사실이다.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삼저 호황으로 경제가 나빠지지 않게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관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정확한 진실을 반영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그 뒤의 발언은 '그렇지만 국민을 학살한 자이기 때문에 절대 존경될 수 없다'라고 이어진다. 방점은 당연히 '존경될 수 없다'에 있다. 이것이 맥락을 고려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재명의 실언'은 거짓이지만 '윤석열의 실언'은 진실이라고 본다.
논점이 흐려질 수 있으므로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실언 보도의 참 거짓'이 아니라 "가난하고 배운 게 없으면 자유를 모른다"라는 제목을 수정하는 것이 왜곡을 바로잡느냐, 혹은 바람직한가에 있다. 앞서 밝혔 듯, 원제는 완벽한 제목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정할 거리도 아니다. 진실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완벽한 제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편집은 기자의 재량이 보장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겠다. 수화기 너머의 아무개의 주장처럼 위에 기술한 표현이 정말 본질을 왜곡하는 것인가? 실제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그리고 이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나 혼자 자유를 지킬 수 없습니다. 자유는 힘이 센 사람들이 어, 핍박하고 억압하고 할 때 또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외적이 침입을 했을 때 연대를 해서 지키는 것이고
1) 자유의 본질은 일정한 수준의 교육과 그리고 기본적인 경제 그 역량이 있어야만 우리가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자기가 자유가 뭔지 알게 되고 나한테 있어 자유가 왜 필요한지가 나오는 겁니다.
2)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그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3) 저는 공동체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한데 놓고 그 사회에서 산출된 그 생산물이 시장을 통해서 분배되지만 상당한 정도의 또 세금을 걷어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눠서 그분들에 대한 교육과 경제의 기초를 만들어주는 것이 자유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고요…"
아무개가 요구한 제목은 1)이다. 사실 발언의 본질만 생각한다면 3)을 따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로서 검증받는 시기를 고려하면 2)가 가장 본질에 가까워 보인다. 그가 평소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모든 결과물이 생성되는 뿌리와 같다. 후보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정책, 어떤 행정을 수행할지 가늠해 볼 좋은 지표다. (왜곡됨을 핑계로 아무개가 1)로 바꿔달라는 까닭은 그가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단지 2)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1)은 2)를 바꿔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굳이 '왜곡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3)으로 바꿔달라는 것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윤석열에게 자유는 '자격을 갖춘 자들의 권리'다. 경제력, 혹은 교육 수준 둘 중 하나라도 만족되지 않으면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 두 요소가 자유를 만족시키는 필수요소인지 따져보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윤석열은 돈과 지식이 없으면 자유를 감지하는 심리적 요소까지 박탈시키고 있다. 그래서 자유가 없는 이들에게 경제력과 교육을 주어 자유의 기본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 감지조차 못하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준다는 모습을 연출시킨다는 점에서 권력관계가 드러난다.
많이 벌고 많이 아는 자는 소중한 '자유'를 알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자유'를 느낄 수 조차 없어 마땅히 '자유'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시혜를 베풀듯이 말이다. 윤석열에게서 '과학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 그렇지 못한 문명, 대중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근대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 논리가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바탕이 되어주었음은 상식으로 통한다.
윤석열은 해당 발언이 논란을 부를 수 있다는 청중의 지적에도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1)을 재차 언급하여 발언의 취지라고 오해를 종식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논란은 커졌다. 대중들도 아는 것이다. 자유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 복지 정책을 펼치겠다는 의미를 외피로 드러난 발언 그 이면엔 선민의식, 엘리트주의가 깔려있다는 점을 말이다.
‘빈자에게 동냥을 해야 한다.’는 말은 좋은 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주장을 이끄는 원인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함께 사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이는 '더 굶기면 단체로 일어나 봉기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윤석열이 후자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말은 좋아도 그 이면의 생각을 알고 나면 생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대통령 후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 이념, 지향점은 모두 검증의 대상이다. 과연 저 발언은 본질을 왜곡한 발언일까? 내 생각엔, 저 당시에 언급한 음절들의 뭉치에서 '후보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꺼내야 한다면 마지막 문단의 발언을 인용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의 내면, 그의 모든 생각이 지탱하는 가치를 꺼내야 한다면 원제 그대로 가야 한다.
이미 다른 언론들이 그의 시각을 문제 삼고 있다. 진정으로 그의 세계관을 꺼내온 것인지, 그저 조회수와 흥행을 바란 언론사들의 요구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굳이 그를 배려해가면서까지 발언의 취지를 '윤석열'의 입장에서 보도해주고 있지는 않다. 마치 수화기 너머 아무개가 윤석열의 입장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까닭은 이재명이 '전두환 발언'으로 이슈가 되었을 땐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본질을 흐리고 있는지 새까맣게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