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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ug 02. 2023

직업인, 교사

교직경력 3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생각해 보면, 교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위치는 참으로 변화되어 왔다.

20여 년 전의 교사, 특히 초등교사는 여자에게는 집안일과 육아를 양립하기 좋은, 하지만 딱히 그 외 매력은 없는 그저 그런 이미지의 직업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기대 수준은 높아서 교사 직업을 성직관과 전문직관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며, 교직을 높이 평가하는 듯하였지만 사실 세속적인 금기가 많고 희생적인 이미지에 가까웠던 점에서 성직관의 굴레가 씌워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교사로서의 나는 행복하였다. 젊고 열정적이기만 하지 엉성했던 나의 온갖 시도에 즐겁게 따라 주었던 순수했던 아이들이 나를 지탱해 주던 전부였다. 어설픈 초보 교사의 엉뚱 발랄함에 일부 학부모들은 다소 난감해했지만 교사의 열정에 존중과 지지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촌지와 체벌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 내가 촌지를 거절하는 것이 유난해 보일까 두려웠던 나는 동료 교사의 촌지 이야기에 맘껏 반대 이야기를 하지 못했지만 학교 인근에서는 촌지를 안 받는 드문 교사로 소문이 났다. 체벌을 안 했지만 아이들의 잘못에 감정이 격해지면, 아이들에게 나를 때리게 하는 엽기적인 행동도 아주 가끔 했다.


10여 년 전 교사는 철밥통에다 연금이 짭짤한 직업으로 각광받으며 인기가 급상승하였다. 교사에 대한 인식은 성직관은 벌써 퇴물이 되어 사라졌고, 전문직과 안정된 공무원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었다. 유능하고 젊은 교사들의 신선함과 빠릿빠릿함 속에서 육아에 지친 나에게는 권태기가 찾아왔다. 이미 세상은 바뀌어 권위적인 교사들은 빠르게 줄어갔고, 학교는 학생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니 분명히 초창기의 마음 그대로 아이들을 대하는데 아이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나의 애매한 열정과 애매한 교육방법은 아이들에게 답답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나의 온 삶은 육아 등 일상에 매몰되어 변해가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바쁘고  무감각한 상태로 그저 열심히 다니기만 했다. 점차 그저 그런 교사가 되었다. 결국 나만의 학급 경영을 추구하기보다 평범하게 잘 굴러가는 일 년을 꿈꿨다. 차라리 엄격한 교사가 되고 싶어 때로는 매를 들기도 했다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학급운영이 되고 말았다.


몇 년 전부터 나는 50대로 늙은 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의 세상은 교사에게 서비스직으로서의 직장인의 가치를 요구한다. 특히 초등은 교육과 돌봄이 섞여 그 무엇에도 교사는 한계를 느끼기 쉬워졌다. 거기에 늙은 여교사인 나는 학부모와 학생 고객분들에게 딱히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명퇴와 정퇴 사이에서 순간순간 고민한다. 여전히 과거의 열정은 관성처럼 남아서 내 마음을 휘젓지만 에너지와 감각, 아이디어는 정체되어서 학급운영은 삐걱거린다. 지금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쳐지나 온 각종 많은 교사들 중 올해에 만난 여러 교사 중 한 명으로 나를 적당히 대한다. 하지만 그 많은 교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공부량, 많은 아이들이 함께 좁은 교실에서 생활하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어린이들이 있다. 그런 자신의 에너지를 조절하려는 교사에게 대항하며 그들은 강력하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의 말과 행동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서, 하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공감도 하면서 하지만 만만하지는 않은 말투로 설득시켜야 한다. 몇몇 아이는 자기중심적인 논리로, 또는 교사 논리의 빈틈을 노려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친다. 그러면 일단 이야기를 중단하고, 좀 더 시간을 가지는 방법을 취한다. 더 이상은 서로의 감정이 묻어서 대화가 되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매일 이러한 민원 해결이 최소 한 건 이상, 많으면 3건이다. 여기에 학부모의 오해나 비협조가 따르면 삶의 에너지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들은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이제야 진로에 대한 개념 정립을 시작했다. 10대 시절 되고 싶은 것이 없어서 돈 많이 벌고 편한 직업을 꿈꾸며 일단 경영학과에 갔었다. 이제 와서야 뭔가 남들을 도울 수 있는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싶다며 자신의 전공과 관련 없는 방향을 여기저기 모색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업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구나 크든 작던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고 살고 싶어 한다. 나만의 정당한 소명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돈 버는 기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과도한 소명의식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도 힘들지만, 단순한 직업인으로 살기는 더욱 힘들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애정 없이 업무적으로 처리하기에는 극한의 멘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만의 소명의식으로 자신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소명의식이란 것은 주변의 지지와 나 스스로의 정당성이 없다면 결국 피로감에 쓰러질 수밖에 없고 만에 하나 주변의 오해와 비난에 처한다면 자책감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많은 교사들이 정신과 약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작금의 심각한 교권침해 현상은 교사들의 소명의식을 하나씩 갉아먹으면서, 일부는 밋밋한 직업인으로 살며 버티는 것으로, 일부는 휴직과 복직을 번갈아 하며 서서히 삶의 의미를 잃어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교사에게 기계적인 상호작용은 교사의 정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30년 전 얼치기 성직관으로 교사를 시작했던 나는 이제 교직관에 대한 거칠었던 모서리가 많이도 부서졌다. 그러면서 지금의 시대에 부끄럽지 않은 교사로 마무리하기 위해 오늘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 치열한 방학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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