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주의보가 한 달 가까이 계속되는 여름의 한낮 더위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나의 몸뚱이를 책상에서 소파로, 다시 방바닥으로 점차 끌어내린다. 이러다 땅 속으로 파고들려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나는 곧 더위와 졸음의 용광로인 이 공간을 떨치고 나갈 예정이다.
비록 더위에 발목을 잡힌 나는 굼뜨디 굼뜬 몸짓으로 수건과 물통, 글러브를 겨우 챙기고 현관문을 나서지만, 한 시간 반 뒤면 얼음물로 샤워를 한 듯한 짱짱한 정신으로 다시 이 문을 힘차게 열고 돌아올 것이다.
나는 뭔가를 배우기를 좋아하지만 대체로 잘하지는 못하는 슬픈 몸을 가졌다.
과거를 돌아보면 피아노와 장구, 배구, 배드민턴, 탁구 등 몸으로 하는 것을 1년 이상 열심히 배워봤지만 기본을 겨우 넘어서는 수준에서 숙련자로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중급자가 되기에는 뭔가 부족한 2%가 나의 dna에는 있다.
그런 내가 올여름 새롭게 시작한 것이 복싱이다.
내가 이 나이에 복싱을 배우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우아한 필라테스나 고상한 요가를 권하며 난색을 표했었다. 하지만, 나는 유연함과 거리가 먼 내 몸을 알기에 사지의 근육을 끙끙 대며 늘여대다 결국 좌절하는 또 하나의 슬픈 몸치 이력을 세울 것이 확실한 필라테스나 요가보다는 차라리 치열해 보이는 권투에 좀 더 마음이 갔다.
목적은 단지 여름 무더위에 늘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현재 상황을 볼 때 그 목적은 대체로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나의 방학 일과는 오전 9시에 도서관 가서 책 읽고 글쓰기, 12시에 돌아와 점심 먹기, 2시에 집안일하기, 3시 반에 복싱장가기, 5시에 연격연수 듣기이다. 그런데 도서관을 다녀와서 점심을 먹은 후부터 나는 견딜 수 없는 나른함과의 투쟁으로 오후의 일과가 엉망이 될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복싱을 배우지 않았다면 내 오후는 그야말로 잠과 함께 하는 헤롱헤롱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싱을 다녀오면 오후가 달라진다. 복싱을 다녀와 샤워를 하면 숙면을 하고 일어난 듯 정신이 맑아져 새로운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다.
또 다른 복싱의 매력은 혼자만의 운동이라는 점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의 속도로 나아가면 된다.
예전에 배드민턴과 탁구를 일 년 정도 배웠을 때 나는 경기의 재미는 확실히 있었지만 경기를 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었다. 즉 실력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늘지 않는 실력, 그에 따라 경기하는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고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담감, 그리고 속 시원한 경기가 되지 못하는 아쉬움. 반면 복싱은 연습할 때 힘든 강도는 높지만 정신적으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 잡생각이 사라지는 편안함이 매력이다. 나 혼자 열심히 거울 보고 뛰면서 내 자세를 연습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복싱은 깔끔한 운동이다. (이건 아직 복싱 한 달 차인 나의 주관이므로 추후 달라질 수 있다는 게 함정)
따라서, 더위의 맹렬한 공격에도 움츠리지 않는 복서의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한껏 샘솟는 에너지로 다시 새로운 오후를 시작한다. 연격연수와 집안일 등을 열심히 하면서 더 이상 방바닥에 x-ray를 찍기 바쁜 여름 나무늘보가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