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 윌 헌팅은 언제나 능력과 기회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소환되는 작품이다.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윌 헌팅이 사실은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현대 사회가 숭배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영화는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어떤 제도적 보상을 불러오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과 자아의 성취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 윌은 자신의 머릿속에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낼 능력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능력이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척도와 결코 동일하지 않음을 몸으로 경험한다. 그는 학계와 기업에서 주어지는 화려한 미래를 거부하고, 결국 사랑과 인간적 관계 속에서 삶의 방향을 다시 모색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능력이 곧 삶의 가치인가?”
여기서 우리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을 떠올리게 된다. 샌델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의 논리가 오히려 불평등과 분열을 심화시킨다고 비판한다. 누구나 노력하면 올라설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 능력은 개인의 노력만이 아니라 출신 배경, 사회적 자원, 운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능력주의는 결국 성공한 사람에게는 오만을, 실패한 사람에게는 굴욕을 강요하는 구조로 귀결된다. 노력의 결과가 공정하게 평가받는다는 믿음은 민주주의의 윤리를 지탱해온 약속이지만, 그 약속이 허구로 드러날 때 사람들은 체제에 대한 신뢰를 잃고 분노한다.
윌 헌팅은 자신의 재능을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은 ‘능력을 증명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수학 천재’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가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상처 입은 과거와 화해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는 능력주의의 전형적 함정에 대한 반례다. 능력이 있는 자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강요, 그 능력이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윌은 오히려 자유를 잃고 있었다. 굿 윌 헌팅은 “능력을 따르지 않는 삶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문학적 서사로 보여준다.
샌델의 비판은 이 지점에서 깊이를 더한다. 그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자기 덕분이라 생각하고, 실패를 자기 탓이라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공의 오만’과 ‘실패의 굴욕’은 사회적 연대를 해치고,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윌의 삶이 상징하는 것은, 능력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 인간적 관계와 의미를 삶의 중심에 두려는 몸부림이다.
샌델은 동등하다는 착각에서 오늘날의 meritocracy가 사실상 허구적 약속에 기초한다고 지적한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이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학력, 경제적 기반, 지역적 환경 등이 개인의 기회를 구조적으로 제한한다.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굿 윌 헌팅에서 윌이 처한 상황 역시 이를 드러낸다. 그는 천재적 재능을 가졌지만, 빈곤한 가정과 학대의 상처 속에서 자라났다. 만약 그의 재능이 우연히 발굴되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보이지 않는 계층의 경계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능력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드러나며, 결코 순수한 개인의 산물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겉으로는 공정의 이름을 빌리지만, 실제로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조다. 능력이란 언제나 사회적 문맥과 기회의 불균형 위에서 평가된다. 그래서 샌델은 ‘자격의 폭정(tyranny of merit)’이라 부른다. 능력을 기준으로 서열을 매기는 사회에서, 능력이 적다고 여겨진 이들은 스스로 열등하다고 낙인찍히고, 결국 존엄을 잃는다. 윌이 선택한 삶은 이런 구조에 대한 거부이자, 능력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대학 입시, 취업 경쟁, 그리고 승진 구조 등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있다. 한국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입시에서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해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경쟁하며, 직장에서의 성과지표는 개인의 가치를 단일한 수치로 환원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적 관계는 뒷전으로 밀리고, 실패한 이들은 자기 탓이라는 굴레에 묶인다. 샌델은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유라고 본다.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존중하기보다, 능력에 따라 줄 세우기를 반복한다면, 결국 공동체적 연대는 무너진다. 미국과 유럽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한 것도, 바로 능력주의의 냉혹한 체계가 만들어낸 박탈감과 분노 때문이었다.
굿 윌 헌팅은 단순히 한 천재 청년의 성장담이 아니다. 그것은 능력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삶의 궤도를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을 찾으려는 여정이다. 윌의 선택은 철학적으로는 샌델의 논지와 닿아 있으며, 문학적으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울림을 남긴다. “인간은 능력으로 평가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능력은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사회가 능력을 기준으로 줄 세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동등하다는 착각’ 속에서 더욱 불평등해질 것이다.
결국 능력주의는 매혹적인 신화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희망처럼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실패한 이들을 비난하고, 성공한 이들을 오만하게 만드는 잔혹한 구조가 숨어 있다. 굿 윌 헌팅은 이 신화를 개인적 차원에서 깨뜨리는 이야기이고, 동등하다는 착각은 그것을 사회적·철학적 차원에서 해부하는 작업이다. 두 작품이 교차하며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능력은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지 않는다. 삶의 본질은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발견하고 관계를 맺는 데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인간다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