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

파노라마처럼.

by Stella

어느 날부터 마음속에 남은 사람들의 얼굴이 계절처럼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들을 '시절 인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때는 하루의 온기였고, 나의 선생님이었던 사람들.

첫사랑, 직장동료, 학교친구들. 내 인생의 장면마다 또렷이 남아 있던 얼굴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각자의 계절에 머무는 연인처럼 흘러가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인연이 흐려진 것도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친구들, 직장에서 함께했던 사람들. 10년, 15년이 지나도록 연락이 이어지는 이들이 있다.

오랜만에 마주해도 그 시절의 내가 불쑥 튀어나온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말투, 웃음, 장난, 고민, 허세까지도

그들 앞에서는 다시 살아난다. 가끔은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그들이 먼저 기억해 내고, 그 기억이 내 현재를 비춰줄 때가 있다. 문득문득, 아무렇지 않게, 여전히 내 옆자리에 머물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예전보다 지금 더 크고 묵직하게 마음을 울린다.

고마움이라는 감정도 시간이 지나니 더 진해질 수 있다는 걸, 그들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러다, 새로운 곳으로 삶을 옮기고 영국에서 처음 맞이한 고독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짙고 깊었다.

타지에서의 외로움은 '혼자 있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없어진 것들을 실감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누군가 한국에서 나를 보러 왔다가 귀국하는 날이면,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창 안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숨만 삼켰다. 창밖 풍경은 그대로인데, 내 안만 휑하게 꺼져 있었다. 그들이 눕던 침대, 앉던 소파, 같이 밥 먹던 테이블, 밤늦게 수다 떨던 거실.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온기는 잔상처럼 남았고, 그 잔열이 나를 조용히 흔들었다.

그런 나를 본 남편은 요즘엔 누가 온다고 하면 제일 먼저 "떠나고 나면 네가 또 힘들까 봐"를 걱정한다.


한국에 있던 나는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줄이면 얼굴을 보고 밥을 먹고 울고 웃던 사람이 있었다.

일이 생기면 내가 달려갔고 그들도 달려와 줬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조용히 멈춘다. 14시간의 비행, 비행기 값, 각자의 사정과 생계.

가족조차 큰 결심 없이는 건너올 수 없다. 그렇게 서로의 기대는 사라지고, 바람도 사라진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 침묵의 거리감이 자연스럽게 굳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거기서 친구도 사귀고 적응하면 되잖아?"

듣기엔 간단하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에, 정착도 소속도 불분명한 이 땅에서 낯선 사람에게 "저랑 커피 드실래요?" , "우리 친구 할래요?"라고 말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 이상한 사람 취급이라도 받으면 그게 더 지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에너지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 해도 새 친구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엔 없으면 숨도 못 쉴 것 같던 친구들도 각자 버티느라 먼 사람이 되었다. 1년에 한두 번 보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있는 인연조차 흐려지는 시기"가 내 앞에도 조용히 왔다. 그런 시기에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는 건 나에게 가장 큰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처음부터 알아가고, 정 붙이고, 실수도 견디며 관계를 쌓으려고 하면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이것이었다. "에너지 낭비."

남은 몇 명의 친구를 챙기기도, 가족들을 돌보기도 벅찬 현실에서 말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도 우정도 결국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함을 나눌 힘도 마음의 공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건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일들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또렷한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없다고 체념할 게 아니라, 없다면 내가 만들어보면 되지 않을까?", "분명 나처럼 힘든 사람이 있을 거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나는 기다림을 그만두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영국의 유명한 한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어느 어느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실 분~~!!!!"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다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쯤 마셔보자는 마음을 담았다.

(사실 만약 장기적으로 이 모임이 유지되면 사회활동이나 봉사활동도 할 포부가 있었다!)


사실, 제목과는 정 반대로 속으로는 대단한 용기를 내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도전이었다.

'한 명만 와도 정말 고맙겠다... 설마 사람들이 오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저도 그래요!"

"저도 외로웠어요"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40대의 아줌마도 손을 들어도 될까요?"

그 말들이 조용히 쌓이더니, 어느새 '우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때 알았다. 인연은 어느 날 들이닥치는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용기 위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자 잠시 멈춰 고민했다. 너무 많은 얼굴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사라질까 봐.

그래서 늦게 연락 온 몇몇 분들께는 정중히 양해를 구해야 했다. 나는 숫자가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되고 깊이 남아 있을 사람'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외로운 이민자 무리'가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사연이 느껴지는 얼굴들이었고, 각자의 시간을 견디며 여기까지 걸어온 강한 사람들이었고, 마음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닿아버리는 존재들이었다.


사실 나는 과거의 사람들도 '시절 인연'이라는 말 하나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한때 내 전부였고, 지금도 여전히 내 인생 한편을 환하게 비추는 존재다. 떠났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흘렀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도 내 삶 어딘가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이 낯선 땅에서 새롭게 만나게 된 이 사람들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외로움과 결핍 위에 처음으로 놓인 인연이라서인지, 그들이 남길 흔적은 길든 짧든 오래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번 화에 다 담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천천히, 다음 화에 제대로 풀어 보려 한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 하나로 묶기엔 이미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그들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잃고 싶지 않았다. 그 감정이 다시 살아날 줄, 나도 몰랐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그러나 그들의 팔색조 매력을 뽐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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