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로 떨어지는 새벽 전 무에 부직포 덮어주기
2023년 11월 22일 수요일, 곡성에서 핸내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22번째 메일 '나로 살기로 핸내(나살핸)'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가을은 잘 보냈나요?? 여름에 잠들었다 깨어났더니 겨울이 된 것처럼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것 같아요. 휴재공지를 한지 어언 1달 반... 이곳의 가을을 기록하지 못한 채 첫눈을 맞이했네요!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이제는 진짜 나살핸을 써야겠다 다짐했어요. 시간의 흐름을 절실히 체감해버린 것이죠.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어떤 이야기부터 할지 고민이었지만, 무엇이든 내뱉어보려합니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혼자서 메일 쓰는 이 시간, 그리웠어요. 드디어 제 소식을 메일에 실어 보내네요. :)
https://www.youtube.com/watch?v=cW6W8SOo2Hw
눈 왔어요~~ 여러분, 올해 첫눈 보았나요?? 첫눈 오던 날, 무얼 하고 있었나요?? 지난주 금요일, 곡성군농민잔치에 다녀왔는데요. 맛있는 것도 먹고 공연도 보고 신명 나게 놀다 왔답니다. 행사는 오일장을 빌려 진행되었어요. 날이 너무 추워, 사람들이 드럼통난로에 옹기종기 모여 온기를 나누었어요. 낮엔 비가 오고 새벽엔 영하 3도까지 내려가는 날이었죠. 영하의 날씨가 지속되면 무에 바람이 들어 먹기 어렵대요. 그래서 못자리 만들 때 사용했던 부직포로 덮어주어야 했어요. '어쩐담... 집 가서 무 덮어줘야 하는데.. 날도 춥고 곧 어두워질 텐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차가워진 손과 발. 하지만 칼바람으로부터 무를 지켜야 했기에 피로와 추위, 어둠은 핑계가 될 수 없었어요.
방에서 밍기적거리다가 겨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어요. 연어, 볕뉘와 함께하기로 했어요. 헤드랜턴 2개와 자전거 랜턴 1개의 빛에 의지해 부직포를 무 위로 펼쳤어요. 부직포 양쪽 끝을 잡아 펼친 후,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덮어주었어요. 고춧대와 대나무로 부직포가 펄럭이지 않도록 고정해 주었고요. 아래, 윗밭 잘 덮어주었을 때, 마침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어요. 한밤중, 밭에서 친구들과 무 덮어주다 맞이한 첫눈이라니! 너무 신이 난 나머지 팔짝 뛰고 소리치며 감탄했어요. 왠지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행복해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죠.
https://www.youtube.com/watch?v=c3MPfnOhVG8
밤 10시면 그치는 줄 알았던 눈은 새벽에도 내렸는지, 마을을 하얀 세상으로 만들어놓았어요. 예상치 못한 설경에 압도되었어요. 시골의 눈 내린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톡 치면 호도독 떨어질 것 같던, 나뭇가지에 얹어진 눈. 지붕과 산 위에 폭신하게 쌓인 눈. 기차 타고 가는 길 창밖 설경은 또 어찌나 포근하고 영화 같던지. 속으로 행복하다는 말이 연신 되뇌어졌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bdsRY71Ifg&feature=youtu.be
문득, 작년 겨울 첫눈은 어떻게 맞이했는지 궁금해졌어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첫눈은 기억나지 않았고, 눈 오는 날 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했던 때가 떠올랐어요. 펜과 연명부가 끼워진 판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도시락 카트를 질질 끌어 어르신들 가정으로 향했어요. 두툼한 롱패딩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혹여나 미끄러질까 뒤뚱뒤뚱 조심히 아파트 입구를 지나쳐 전달했던 기억.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아 잠시 숨을 돌리던 때가 떠올랐어요. 새삼 지금의 일상이 새롭게 느껴졌어요. 계절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이 생활에 만족스러운 마음이 드네요. 평생 시골에서 살고 싶어요~
1. 이달의 노래: 방(윤숭) "잠들기 전, 눈 감고 앉아 윤숭님 목소리 들으면 평온하고 안정 돼. 이번 해 나의
가을을 책임진 가수"
2. 이달의 책: 우리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마을공동체 탐사기(조현/휴) "로컬모임에서 같이 읽은 책. 이곳저곳에 존재하는 마을공동체의 예시를 여럿 볼 수 있었다. 읽은 책이 이거 말고는... 뭐 있지??"
3. 이달의 영화: 퀴어마이프렌즈(서아현) "감독 아현의 게이친구 강원. 자기 본 모습대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강원의 삶을 친구의 시선으로 담고 있다. 이 둘의 관계성이 흥미로워 그걸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교회와 퀴어'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4. 이달의 음식: 된장배추나물 "농부가 토종배추 따와서 삶아 된장무침을 했다. 갓 따온 배추 삶는 냄새 너무 좋았다. 나물은 또 얼마나 맛있던지. 꼭 다시 해먹어야겠다."
5. 가장 많이 먹은 음식: 고구마밥 "드디어 고구마를 캤다! 굼벵이도 먹고, 내가 삽으로 찍어버린 것도 많았지만^^ 도려내고 먹었다. 압력밥솥에 밥과 같이 찌니 달고 맛있었다."
6. 가장 신났던 순간: 춘자삼춘네에서 인터뷰는 못하고 밥만 얻어먹고 난 후 볕뉘집 가서 친구들에게 인터뷰 짤 당한 썰 풀기 "예상치 못하게 열무김치랑 김, 내가 만들어간 호박전에 밥 먹고 왔다. 따수운 춘자삼춘. 때마침 친구들이 볕뉘집에 모여있어 재밌게 놀다 갔다."
7. 가장 아쉬웠던 순간: 10월 나살핸 휴재로 농번기를 생생하게 기록하지 못한 것
8. 가장 새로웠던 순간: 친구 논에서 콤바인이 고장 나 벼를 다 손으로 베야 하던 상황, 예상치 못한 역경에 이웃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왔던 때 "콤바인이 고장난 것부터 아주 새로웠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벼 베고 나르고, 탈곡까지 잘 마쳤다. 왠지 이웃들이 어벤저스처럼 보였다.ㅎ"
9. 가장 슬펐던 순간: 내 생각과 마음이 어리게 느껴졌을 때 "다른 이들은 사회적인 것에 관심 갖고 행동할 때, 나는 내 개인의 관계와 재미, 감정에만 관심 있는 것 같아 괜히 어리게 느껴졌다."
10. 가장 낭만적이었던 순간: 보호수 아래에 돗자리 깔고, 떨어지는 단풍 구경하며 친구랑 책 읽었던 때 "살랑이는 바람 타고 떨어지는 단풍,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거의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포스터 촬영할 수 있을 것 같던 하늘, 햇살, 분위기."
11.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바람네 논에서 노랗게 익은 벼 풍경 바라보며 탈곡할 때
12. 이달의 뿌듯함: 지리산 2박 3일 종주 "초보 등산러가 경력자들과 무사히 등반을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대단하다." / 추수 끝! "이제 진짜 겨울이 다가오고, 자자공이 끝나가는구나 실감 난다."
13. 이달의 반성: 미리미리 기억하고 기록하면 쓰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14. 이달의 깨달음: '배려에서 나온 행동인가, 눈치 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인가?' 생각할 것
15. 이달의 농사
- 밭: 고구마 캐기, 고구마순 껍질 까서 김치 담기, 마늘와 양파 밭에 거름 넣기, 마늘 심기, 들깨 털어 정선
- 논: 토종 벼 손으로 베기, 토종 벼 홀테로 탈곡하고 정선하기, 갓 돌리기(콤바인이 지나기 어려운 모서리에 있는 벼 손으로 베기), 벼 펼쳐서 며칠간 말리기
16. 주차 별 생각의 흐름
- 1주차: 지리산 종주, 운동회까지 이웃들과 너무 붙어있었다. 오랜만에 마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들과 시간 보내니 리프레시된다. 가끔 서울 나들이 좋다.
- 2주차: 너무 나 자신에게만 관심 있나? 시야를 넓혀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재미와 일상, 즐거움, 감정, 관계가 중요해. 싱숭생숭. 그렇지만 또 괜찮아졌어.
- 3주차: 햇살 좋은 날, 순천으로 소풍 다녀오고 농악인한마음대회에서 장구도 치고 가을 잘 누렸다.
- 4주차: 벼 추수하는 시기, 온 마을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콤바인 일정이 부득이하게 변경되어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불확실함이 오히려 재밌었다.
- 5주차: 햇살 잔뜩 머금은 카페와 따뜻한 사장님. 읍내 나들이 즐거웠다. 가을 하늘 청명 그 자체다.
17. 한 문장으로 정리한 이번 달: 도파민 분비 증가 / 밤 산책 / 맑디맑은 가을하늘 누리기
나살핸을 다시 쓰는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우선 나살핸 쓰는 자아로 전환이 필요했고요. 기록을 멈추니 쓰는 것이 어렵고, 쓰기 시작하더라도 끝마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렇게 언제 돌아올지 말도 없이 지금까지 쉬었네요. 덕분에 10월 한 달간은 글을 써야 한다는 마감 압박(?) 없이 자유롭게 놀고먹고 일했어요. 그렇지만 그간 마을 넘어 친구들과 소통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과 알차고 재밌고, 농사로 바빴던 10월을 기록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어요. 차차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이만 글을 마칠게요. 2023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음 주 월요일에도 찾아올게요. 모두들 추운 밤 따뜻하게 몸 녹이고 편안히 잠들길 바라요.
가을 햇살 잔뜩 누렸던 나날들☀️
오래간만에 하는 기록이라 사진이 많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