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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Feb 02. 2024

선험적 취향

 첫 직장에 입사하기 전, 미국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뉴욕으로 인,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가 총 30박을 지내고 엘에이에서 아웃.


 출국하기 고작 10일 전에야 비행기표와 대강의 숙소를 예매하고 전날에야 부랴부랴 짐을 챙겨 떠난 미국에서, 나는 26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만의 여행 스타일과 취향을 발견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내게 상대적으로 더 잘 맞는 곳을 감별할 기회가 있었던 데다, 애초에 ‘혼자서’ 그렇게 길게 여행을 떠나본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을 토대로 알게 된 나의 취향은 이렇다:

첫째로, 나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휴양지보다는 시끌벅적한 도시를 더 좋아한다.

둘째로, 나는 각 도시에 발을 들이기 전날까지는 그 도시에서 무엇을 할지 전혀 계획을 짜지 않지만, 전날이나 당일에 벼락치기로 여행 책자를 살펴본 다음 어지간한 관광지를 모두 섭렵하고 돌아온다.

셋째로,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유명한 식당에 들르는 것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넷째로, 나는 현지에서도 웨이트 트레이닝과 러닝을 꼬박꼬박 챙겨서 하고, 가능하면 스튜디오 수업도 들어보려고 한다(이건 솔직히 얼마나 갈 취향인지 모르겠다).



 나의 여행 취향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특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디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내용일 테다. 그렇지만 30박의 여행을 막 마치고 돌아와 ‘경험적 취향’을 정리해본 지난봄의 나로서는 취향이 생겼다는 데서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나도 앞으로 누군가와 여행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소위 말해 ‘취향이 있는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어디서라도 내게 여행을 화두로 던질 사람이 등장해야 할 텐데. 나는 이제 언제든지 여행 취향을 말할 준비가 된 어른인데!

 손을 꼽아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 마침 몽글몽글 ‘썸’을 타게 된 S가 내게 “지원아, 너는 여행 스타일이 어떻게 돼?”하고 물어왔다. 나는 면접관 앞에서 예상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꺼내듯 의기양양해져서는 열변을 토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서는 S가 오랜 시간 내 말에 묵묵히 귀를 기울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의식하고 멋쩍어져 질문을 던졌다.

 “네 여행 취향은 뭐야?”

 “나? 나는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는 걸 좋아해. 원래 여러 군데를 쫓기듯이 급하게 돌아다니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역시, 성격이 급하고 칠칠치 못한 나와 반대로 과묵하고 진중한 S답다.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말하는 여행 취향이 참으로 멋들어지는구나. (S와의 썸에 한껏 취해있던 나는 사실 S가 어떤 대답을 하든 멋져보일 때였다.)


 “오, 네가 길게 머물러본 곳은 어딘데?”

 또 한 번의 질문과 함께 초롱초롱한 눈빛을 던졌다. S가 입을 떼기 전 그 짧은 새에 내가 한두 달쯤 머물고 싶은 수많은 도시가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꼭 한 번쯤은 길게 지내봤으면 싶었던 세비야,

인간 문명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듯했던 파리,

우중충하고 쌀쌀했지만 도보로 도시 곳곳을 누비기 좋았던 런던,

같은 아시아 문화권이면서도 영어가 통하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서울과 비슷한 듯 다르면서도 한국과 가까워 오가기도 좋은 도쿄, (헥헥)

아니면 내가 막 다녀왔지만 얼마나 머물렀다고 그새 그리워진 뉴욕……!


 그런데, 돌아오는 S의 대답이 압권이었다.


 음, 내가 길게 머물러본 데는 없어.


 응, 뭐라고?

 귀를 의심하게 하는 대답에 천진한 표정과 당당한 눈빛까지 더해져, 한순간에 맥이 쑥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시야로 들어왔던 S의 모습은 내 짧은 표현력 때문에 지면에 생생하게 옮겨오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잠깐의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내 웃음소리였다.

 프하하하하!

 그리고 꼭 그 정적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S도 갑자기 하하하하핫, 웃기 시작했다.



 프하하하하, 하하하하핫!


 내게서 S에게로 웃음이 전염되어 우리 둘은 한참을 웃었고 나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느라 급기야는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기까지 했다.


 웃음의 굴레에서 먼저 빠져나온 건 웃음의 원인을 제공한 S였다.

 “나는 네가 취향을 말해보래서 말한 것뿐이지, 널 웃기려고 말한 건 아냐. 근데 말하고 나서 네가 웃길래 생각해보니까 나도 웃기더라고.”


 웃을 건 다 웃어놓고 S에게 또 한 번 미안해진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은 꿀꺽 삼키고, 입가에 매달린 웃음은 그대로 달아두고, 말없이 손을 꺼내 S의 손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움찔. S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럼, 네 데이트 취향은 뭐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내 손의 온기와 함께 다가온 날카로운 질문에, 25년 인생에서 어느 한 군데 길게 머물러본 여행지가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어느 한 차례 연애를 해본 경험도 없는 S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어, 데이트 취향이라니……, 그런 걸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해?”


 저기요 S씨, 여행 취향은 선험적* 취향으로다가 잘만 말하면서, 데이트 취향은 경험적인 것만 취급하시나 봐요. 취향에조차 번호를 매겨 차근차근 설명할 정도로 논리정연해서 제법 멋진 나지만, 당신은 앞뒤가 도무지 안 맞아도 한 번 봐 드릴게.

* 경험에 앞서는(a priori), 경험과 독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내가 당황스러워질 정도로 천진하고 당당했던 먼젓번의 표정도, S 본인이 잔뜩 당황해 마지않은 이번의 표정도 어느 하나 빠짐없이 귀여워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데이트 취향은 선험적으로 알 수 없나 본데 그럼 어떡하겠어, 나랑 같이 경험적 취향을 차근차근 쌓아가 봐야지, 그렇지 않겠어? 쉬지 않고 조잘거리다가 웃다가 귀까지 빨개진 S의 얼굴을 눈으로 좇느라 마침내 조용해진 나는, 수줍은 S의 질문에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그저 포개진 손을 꼭 감싸 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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