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에서 출판까지 1
투고 전, 원고 작성,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1. 관심을 발견하다
출간 이후 몇몇 매체는 나를 '건축가'로 소개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는 건축가가 아니다. 국가에서 발행한 '건축사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기에 '건축사'는 맞으나 내가 생각한 기준으로서의 건축가는 조금 더 예술적이고, 자신만의 아이덴티티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나는 그러지 못하다. 실제로 내가 주로 하는 건축설계는 주로 산업시설, 즉 공장을 대상으로 하며 그쪽 건축설계는 '작가정신'같은 건축가로서의 필수(?) 조건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오로지 용도, 기능에 충실하며, 공간의 효율을 중시하고, 원가가 저렴해야 한다. (물론 디자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는 사무동, 복지동, 주출입구동 등도 직접 기본 설계를 하지만,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런 나의 직업적 배경을 놓고 보면, 내가 '서울'에 관련된 책을 낸다는 것이 조금은 엉뚱할 수도 있다. 비유를 하자면 버스를 전문으로 하는 엔지니어가 승용 세단의 미학에 대한 책을 쓴 것과 같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산업시설이라고는 도통 찾아보기 힘든 서울에 대한 책을 쓴 이유는 단순하다. 서울이 좋아서다.
비록 나는 1997년부터 서울살이를 시작하였지만, 2005년 직장인이 된 이후 적지 않은 시간을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현장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2013년 내가 신공덕동에 거주하던 당시, 나는 서울에서 인천 송도로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대략 입구가 두어 군데 존재하는 20~30만 제곱미터의 대 블록 산업단지 내에 있다가, 퇴근 후 그리고 주말에는 입구가 여럿 있는 수천 제곱미터 이내 블록 단위의 동네에 있었으니, 김성홍 교수의 <길모퉁이 건축>에서 언급된 '공룡 블록'이나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언급된 '이벤트 밀도'의 개념을 매일매일 체감하던 시기였다. 그 극단적인 변화에 대한 온도차가 나의 감흥을 뒤흔든 것 같다. 마치 이성에 눈을 뜬 사춘기 소년 같은 감성으로 서울 강북 일대를 틈만 나면 걸었으니 (틈만 나면 걷게 된 사연은 나의 책 프롤로그에 언급이 되어있다) 그 도시가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였겠는가.
2. 출판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하다
14년 봄 아내의 출산이 임박하며, 조만간 만날 아이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동시에 이렇게 마음껏 걸을 수 있는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음에 대한 아쉬움이 찾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이건, 행복한 시간이건 그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우리 인류는 그것들을 그림으로, 글로 기록하였으며 기술이 발전한 후에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기며 순간과 찰나 속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붙들어보려 발버둥 쳐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걸었던 길들을 기록하고, 그 길들에 서린 이야기를 알아가면서 당분간 (육아로 인하여) 걷지 못할 서울 곳곳의 동네와 길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침 당시 손정목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던 시기여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의 구조와 조직의 생성 과정을 비교적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걸었던 거리, 내가 보았던 동네들에 대한 이야기를 잘 엮어보면 괜찮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내 나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고, 다른 부모들이 다 그런 것처럼, 그 아이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나의 시선은 나를 둘러싼 광활한 도시에서 나의 작은 집 안에 있는 한 생명체로 (초고밀도로) 집중되었고, 내가 걸었던 길과 다녀갔던 동네는 그저 먼 추억으로만 느껴지게 되었다. 게다가 오래지 않아 살고 있던 집의 전세 계약도 만료되었다. '육아'란 현실적 문제에 봉착했을 때 본가와 처가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은, 사람과 차량이 뒤섞여서 걸어 다니는 골목길은 더 이상 최고의 보금자리이자 걷기 코스가 되지 못했다. 결국 아내와 나는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던 신공덕동 집을 떠나 본가 근처로 이사한다는 가슴 아픈 결정을 내렸다.
3. 본격적인 도시 스케치를 시작하다
2015년 초,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프로젝트 부지는 먼 타국, 베트남 호찌민시였다. 1년 가까이 한국에서 씨름을 했던 설계도면을 싸들고 호찌민으로 넘어간 시점은 2015년 12월이었다. 처음 두어 달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나마 해가 바뀌고 나서야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요일에 도시를 걸어 다닐 여유가 생겼고, 일요일 오후 즈음 방구석에 앉아 평소 좋아하던 그림을 끄적일 여유가 생겼다.
그림? 갑자기 그림 이야기가 나와서 엉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원래부터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나의 학습장엔 글자와 낙서가 5:5 비율로 채워졌을 정도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서양미술 동아리에 가입하여 학우들에게 "술은 안 마시고 그림만 그린다고" 핀잔을 들을 정도로 그림에 진심이었다. 그 시절 많은 그림들을 그렸는데 대학 졸업 전까지는 주로 인물화를 그렸고, 그 이후에는 시답잖은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절판된 소설 <좁은 방 소녀>의 삽화를 그리거나 책에서도 소개된 직장인 뮤지션, '최보통'의 앨범 표지를 그리기도 했다. 한 마디로 아무 그림이나 막 그렸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도시의 풍경이나 어반 스케치는 도통 나의 관심 밖이었다.
어쨌거나 호찌민에서 주말 오후 시간엔 주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던 날이 이어지던 와중, 최보통이 자신의 새로운 노래 '붉은 입술'의 표지 그림을 요청하였다. (여담이지만, 연예인 '전소민'이 이 노래를 듣고 나의 이 표지 그림을 그녀의 인스타에 올렸으며, 그로인해 최보통과 인연이 되어 '긴 머리를 자르지 않는 이유'란 노래를 같이 만들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복고 느낌 물씬한 노래 제목을 듣자마자 나는 나도 모르게 공덕동 주민센터 인근에 여전히 남아있는 유흥 주점들, 일명 방석집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붉은 입술'이란 간판을 단 상상 속의 유흥 주점 거리를 그렸는데 예상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이미 인물화나, 별 다른 메시지가 없는 초현실 낙서에 흥미를 잃은 상태여서 그런지, 아니면 십 년이 넘는 상세 도면 스케치 작법이 나도 모르게 손이 붙어서 그런지, 건축물로 이루어진 거리를 나는 비교적 쉽게 그려냈다. 그게 처음이었다. 내가 즐겨 그리는 그림이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전환된 시점이. 그렇게 나는 2016년 초중반부터 호찌민의 도시 풍경을 그리면서 외로운 타국에서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습관을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고스란히 이어갔다. 물론 그 대상은 다시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수원과 주말마다 유모차를 이끌고 나들이를 떠난 도시, 서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뜻하지 않게 반응이 좋았다. 하트가 많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돈 안 드는 '좋아요' 버튼 클릭에 그토록 인색한 네티즌들만 보다가 낯선 나라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하트를 받고, 댓글로 칭찬을 받으니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했다. 그렇게 하트가 1천 개 이상 달리는 그림 수가 점차 늘어나고, 팔로워가 1만에 이르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난 생각했다. "그렇다. 사람들은 나의 그림을 좋아한다. 이러한 그림을 엮어서 책을 만들면, 반응이 좋을 것이다." 수년 전, 막연하게 생각했던 출판에 대한 욕망이 다시금 샘솟았다. 게다가 그림이라는 무기까지 있으니 더더욱 용기 탱천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