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픽의 구즈마 Nov 15. 2019

첫 꿈은 킹 선생의 편집자

1인 출판사 구픽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002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고 일단 작가가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 책을 만드는 편집자부터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 스티븐 킹의 책을 읽고 고무되어 크면 미국으로 건너가 킹 선생의 전담 편집자가 되는 허황된 꿈을 꾸었으나 영어가 안 된다는 걸 머지않아 깨닫고 큰 아쉬움 없이 꿈을 접었다. 너무 흔한 소리지만 이후로도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장르문화였다. 홍콩영화가 있었고 퇴마록이 있었고 영웅문이 있었고 톨킨이 있었다. 장르소설 편집자가 되면 얼마나 재밌을까. 원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직장생활 힘들다고 하지만 그건 다 재미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취업할 때가 되자 꼭 가고 싶은 출판사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원하는 쪽으로 풀리진 않자 자신감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어떻게든 책 관련 일만 하자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계속 두드리니 문이 열리긴 했고 어린이책 편집자 일을 하며 처음으로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서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나름 마음의 평화도 얻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정말 우연히도, 가고 싶던 장르소설 출판사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모 사이트에서 공고를 보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직 생각은 그다지 하고 있지 않던 시기였는데도 그 공고를 본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정말 하고 싶던 일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의 결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옮긴 후에도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순간적 결정으로 이직하게 된 그 출판사에서 나는 적어도 일로는 정말 즐거웠다. 해외에서 출간되어 이미 검증된 장르소설들의 한국어 번역판을 편집하고 출간하는 일이었기에 차후 많이 팔리든 그렇지 않든 완성도 높은 번역 원고를 한국에서 최초로 읽는다는 것만으로 가슴 두근거렸고 자부심도 컸다. 무엇보다 유혈 낭자한 살인 사건과 미스터리, 개성 강한 주인공들, 어떤 식으로든 정의가 실현되는 이야기들은 회사생활의 모든 스트레스를 날릴 만큼 인생의 큰 낙이었고 재미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한데 아침 출근 시간이 기다려지고 휴일은 왜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당시엔 회사를 다니는 게 정말 즐거웠다. 


그 즐거움 한가운데에는 당시 내가 관리를 맡고 있었던 회사의 장르소설 카페도 있었다. 처음엔 그냥 시켜서 시작한 일이었다. 신간 정보를 올리고, 우리 책에 대해 질문하는 독자들에게 답하고, 회원들이 리뷰를 쓰고. 그런데,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것도 평범한 취향이기나 한가. 모두가 살인 사건에 열광하고 형사와 함께 범인을 쫓고 반전에 미쳐 버렸으며 다음 사건들―작품들―을 기다렸다.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독자들이 우리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오탈자를 제보하고 다음 출간 일정을 쪼는 회원들의 글마저 사랑스러웠다. 폭발적으로 회원수가 늘진 않았지만 충성도 높은 카페였다. 서너 명으로 시작해서 삼천 명 이상에 달한 근 십여 년간 나의 회사, 나의 낙, 나의 삶을 지탱해준 카페와 독자들! 


오래 다닌 회사를 관두며, 그리고 1인 출판사를 시작하며 이 오랜 독자들과 함께할 방법은 없을까 생각을 많이 했다. 어차피 초기 출간작들은 장르소설 쪽으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고 우리 책도 좋아하지만 오랫동안 카페를 관리하고 유대감을 맺어온 만큼 나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은근슬쩍 기대도 했다. 차후에 쓰겠지만 이건 자의식 과잉이었다.


나는 장르소설에 애정이 있잖아, 나는 경력이 있잖아, 나는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잖아, 과대망상 또한 1인 출판을 시작하게 해준 많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빨리 망해야 다시 입사할 수 있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