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다.
'난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는 있는 것일까?'
내가 내게 이따금 묻는 질문이다.
아들 몫, 오빠 몫, 남편 몫, 아빠 몫, 교사 몫, 동료 몫... 주어진 역할 어느 하나 내게 녹녹한 건 없다. 하여 전혀 익숙해질 수도 없는 업처럼 여겨진다.
충분치 못한 내 품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에 제 몫을 다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모두 내 품에는 벅찬 것들의 나열이기에 각기 상이한 그릇들을 충족시키기란 참 어렵지 싶다.
난 그래서 내게 주어진 삶의 턱이 언제나 높다 싶다. 노력은 하고 있으나 충분히 그 턱을 넘을 만큼은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함을 안다. 애를 쓰며 분발하는 삶을 살아보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늘 뒤따른다.
제대로 살고 있나 누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글쎄다이다.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창피함을 감추려는 숨는 듯한 답이다.
위태로이 모험을 즐기거나 위험을 감수하는 도박을 걸지도 않을 뿐이다. 통용되는 테두리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삶과도 충분한 거리를 둔다. 술자리도 사람 만나는 일도 멀리하며 바운드리를 최대치로 줄이는 것 역시 리스크를 줄이는 의도가 있기도 하다. 행동반경이 넓어지면 문제에 노출될 가능성은 대폭 증가하기 마련이다.
제대로의 표본을 겪었다면 좋았을 것을. 나보다 괜찮은 이들을 만나는 행운이 내겐 가까이 있지 않았다. 빛나는 장점을 본받았으면 좋으련만 저리 살지 말아야지 같은 짙은 어두움만이 가까웠다.
나름의 삶에서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고 보면 후회로 남는다. 조금 더 제대로 할 수 있었던 미숙한 일들이 넘친다.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삶이면 만회라도 해보련만 살아보니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빠지지 말고 훈수 두듯 한발 물러서면 더 잘 보일 일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게 삶이란 절실할수록 그 사건과 더 밀착해 버리고 말았다. 시야가 지나치리만큼 가까워지니 초점도 흐릿해질 뿐만 아니라 전체적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실수와 잘못된 선택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는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지난 후에 알았다. 새로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같은 양상의 반복이었다.
감정적 동요를 다스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근거리는 심장에 인지가 멈추고 본능만 작동했다. 수십 년 같은 일을 반복하니 어쩜 이리 일말의 개선도 안되나 싶었다.
명쾌하지도 못하고 현명하지도 않다. 늘 어리숙하게 겨우겨우 연명하나 싶다. 누군가에게 훼방이 되거나 해하지 않는 수준일 뿐이다. 내가 언제쯤 제 몫을 다하는 날이 올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얼마나 더 성장해야 주어진 책무를 다할지 가늠도 안되기는 하다. 점점 삐걱거리는 몸과 가늘어지며 흔들리는 마음이 나이를 먹어가나 싶다. 흰머리가 검은 머리를 대신하려 하는 마당에도 다 자라지 못했으니 큰일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