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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시민 Oct 10. 2020

공무원 시험이 끝나고

걷다 보니 태풍의 눈이었다

※ 이 글은 공무원 필기시험이 끝나고 쓰인 6월의 기록이다.




희미한 바람에도 나부끼는 23살이었구나, 나는.


준비했던 시험의 1차가 끝나고 문득 생각나 들어온 브런치에 약 2년 전, 비장한 마음으로 써놓은 서랍 속 글을 발견했다. 제목은 ‘결국은 공무원이다’. 부제는 '희미한 바람에도 나부끼는 23살의 기록'. 8글자가 담고 있는 그때의 기억과 마음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만 이내 가라앉는다.


2년에 가까운 시간은 내가 살아갈 길과 방향을 정했고 그 과정은 미치게 치열했다. 추억할 만큼 아름답지도, 되새길 만큼 그립지도 않은 기억. 이쯤에서 아, 결과가 좋지 않았구나 싶을 텐데 다행히도 꽤나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해방감이나 짜릿함은 찰나에 그쳤다.


100분의 시험을 위해 쏟았던 1년 6개월. 하루에 순수하게 10시간은 공부하자는 목표를 이루고자 엉덩이를 짓눌렀던 시간들. 그 과정에서 당연스레 동반자가 된 통증들. 아직 결과 발표가 나질 않아서인지 안개가 걷히지 않은 갈림길 위에 선 느낌이다. 그래도 원하는 바를 달성했는데 마음이 묵직해 호흡이 부자연스럽다.


요즘 길 가는 대학생을 잡고 진로를 무엇으로 정했는지 묻는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공무원, 혹은 공기업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확신은 본인이 그 길 가는 대학생 중 한 명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근거 있는 간증이다. 나 또한 이 길을 가게 될 줄 몰랐고 많이들 하는 거니까 다소 쉬운 마음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나 뛰어든 곳은 세찬 바람이 쉴 새 없이 따귀를 올려붙이는 태풍 속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도전하지만 합격하는 사람보다 불합격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시험이다. 웃는 사람보단 우는 사람이 많고, 불행의 총량이 기쁨의 총량을 압도한다. 낙오할 수도 있겠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두 손 가득 1000페이지가 넘는 기본서들이 들려 있었다.


내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지겹도록 똑같은 날을 보냈다. 눈을 뜨면 공부하고, 점심 먹고, 공부하고, 저녁 먹고, 공부하다가 잠에 들었다. 서러움 따위의 감정이 끼어들 틈도 안 주고 만성피로와 육체적 고통이 들이닥쳤다. 사이사이에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나, 싶은 파란만장한 사건사고가 일어났지만 결국은 제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맺을 수 있었던 결실이었다. (물론 아직 필기 합격 발표가 난 건 아니다. 자가 채점을 했을 뿐이다.)


임의적인 성적이긴 하지만 합격확실권의 점수보다 10점은 높은 점수를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이상하리 만치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환희나 북받치는 오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적막이었다.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걷고 또 걸으니 도착한 곳은 태풍의 눈이었다. 태풍은 안쪽으로 갈수록 더 높은 풍속과 혼돈으로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하지만 꿋꿋이 견디며 꾸준히 걷는 사람은 고요한 태풍의 눈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결국 해냈다, 라는 자만으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누구보다 당신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태풍 속이 얼마나 멀미가 나는지. 얼마나 달아나고 싶은지. 대체 나 빼고 다들 도착한 그곳이 어디인지 막막한 이들의 마음을 공감하기 때문에 이렇게 몇 자라도 적어본다.


이미 우리는 태풍 안으로 들어왔다. 공무원 시험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태풍이 나보다 작을 거라고 생각진 않는다. 가는 길에 만나는 장대비나 숨 막히는 돌풍에 주춤해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저 걷는 것. 휘청이더라도 발을 내딛는 것. 몇 안 되는 발걸음이라도 일단은 나아가는 것. 그렇게 걷다 보면 우리 모두 태풍의 눈에서 만날 것이다. 밤을 괴롭히던 불안과 심박수가 오롯이 느껴지는 긴장감 대신 그토록 바라던 고요와 평화가 당신의 가슴에 깃들기를.


나는 마킹 실수를 하진 않았는지, 마킹병에 걸려 또 다른 태풍 속을 걷고 있는 중이다. 다치지 말고 부디 무탈하게 태풍의 눈에서 인사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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