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만으로도 숨이 가빠 현재를 대충 메꾸듯 살았던 때가 있다.
수건을 바꿨다. 자취한 지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니 나로서는 큰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2015년부터 박과 함께 살면서 각자 자취할 때 쓰던 수건들을 같이 쓰게 되었는데 수건만큼 교체시기가 애매한 것도 없어서 지금까지 쓰게 된 게 벌써 10년이 넘었다. (따지자면 자취를 시작할 때 각자 집에서 쓰던 헌 수건을 챙겨 온 것이므로 수건의 세월은 가늠할 수 없다.) 사실 박과 함께 사는 동안 해마다 수건 교체의 건이 발의됐는데 그럼에도 여태 바꾸지 않았던 이유는 제안하는 사람만 있었을 뿐 시원하게 결정해주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수건 바꿀까?”
“그래 우리 수건 바꿀 때 됐지?”
“언제 바꿀까?”
“그러게 언제 바꿀래?”
월세 내기도 빠듯해 앓는 소리를 하는 주제에 수건 좀 헤졌다고 새것으로 바꾸는 일이 엄청난 사치처럼 느껴져서 차라리 매일 몸을 닦을 때마다 욕망과 현실의 간극을 실감하는 편이 속 편했다. 막상 수건을 바꾸고 나자 클릭 몇 번으로 끝나는 이토록 간단한 일을 몇 년 동안이나 망설이며 미뤄왔다니 무색하고 후련했다.
대망의 수건 교체의 날. 헌 수건들을 세탁해 건조대에 너는데 한 장 한 장이 그야말로 역사였다.
이 수건은 박과 내가 집에서 셀프 염색을 한 날 갈색 얼룩이진 수건, 저 수건은 전 남자친구와 여행 갔을 때 뒤바뀐 수건, 그 수건은 강아지 전용 수건인데 동생이 자꾸만 착각하고 제 몸을 닦았던 수건. 수건 한 장 널 때마다 그에 얽힌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있는 줄도 몰랐던 수건 정을 새삼 확인했다. 하긴, 10년 이상을 아침, 저녁으로 주인의 맨 몸을 닦아줬는데, 정이 들지 않았다면 수건으로써도 참 섭섭한 일일 것이다. 깨끗이 세탁한 헌 수건은 우리 집을 떠나 필요한 곳에서 쓰임을 다 할 것이다. 고맙고 딱하다. 그러고 보면 무생물에 시나브로 스미는 정은 어째서 꼭 바꾸거나 버릴 때가 되어서야 자각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럴듯한 가구를 새로 들인 것도 아니고 고작 수건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일주일 내내 들떴다. 크기도 색깔도 제각각이었던 헌 수건들 대신 같은 두께와 같은 색깔의 수건들로 빼곡히 채워진 수건 장은 아침, 저녁으로 소소한 기쁨을 줬다, 새 수건의 도톰하고 포근한 촉감은 씻은 후에도 또 씻고 싶게 했다. 무엇보다 얼마간의 기쁨을 보장받은 듯 마음이 든든했다. 박도 나와 비슷한 강도의 행복을 맛보는 눈치였다. 행복이라는 것은 이토록 참 대단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살면서 알게 모르게 흘려온 실수들과 오점들로 얼룩덜룩해진 인생을 통째로 갈아엎어야지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다. 지난 일에 대한 후회만으로도 숨이 가빠 현재를 대충 메꾸듯 살았던 때가 있다. 삶은 되감기와 빨리 감기 없이 정속으로만 플레이되는 정직하고 생생한 현장일 수밖에 없어서 일찍이 놓친 행복을 아까워하거나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는 사이에 지금의 행복을 놓치게 된다. 이 사실은 나도 너도 남도 다 아는 너무 뻔한 진리인데도 나는 대단한 성인이 아니므로 자주 행복을 놓치며 평범하게 산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아주 작은 기쁨을 행복으로서 확장시킬 줄 안다. 기쁜 순간, 그 속에 오래오래 멈춰있고 싶지만 어차피 인생에 ‘일시정지’ 기능 따위는 없다. 대신 해당 시퀀스를 파고들며 늘린다. 바뀐 건 수건 몇 장이지만 이를 통해 과거보다 나아진 내 처지를 알아본다. 최소한 새 수건 몇 장만큼 이라도 발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삶 앞에 떳떳해한다. 새 수건의 포근함을 샅샅이 누리며 행복하다는 말을 내뱉는다. 별 것 아닌 것에도 행복해하는 자신을 칭찬한다. 어느 순간 내가 수건 때문에 행복한 건지 아니면 원래 행복한 사람이라 수건에도 이토록 기뻐하는 건지 잘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 5월 23일 자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