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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Jan 08. 2021

행복의 나라, 동화의 나라

국가의 이미지는 누가 디자인할까?

한국에서 20여 년간 디자이너와 마케터로 일하면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들고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 만들었던 브랜드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지금까지 일관되게 가져가고 있는 브랜드는 거의 없다. 담당 디자이너가 바뀌고, 브랜드 매니저도 바뀌고, 때로는 기업의 경영진도 바뀌면서 여지없이 브랜드의 정체성도 이미지도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많은 비용을 들여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서 개발된 브랜드였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도 하고, 새로운 트렌드가 반영되기도 하고, 또 회사의 경영방침이 바뀌기도 하면서 브랜드도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부분 처음부터 백 년 이상 건강하게 유지될 브랜드를 생각하고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쉽게 브랜드의 정체성을 바꾸는 이유이기도 했다.

순간순간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로 브랜드에 새 옷을 입히기도 했고,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의 정체성을 성과가 부진해지면 쉽게 바꾸기도 했다. 브랜드가 새 옷을 입으면 예전보다 더 좋아지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덴마크에 살았던 기간 내내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브랜드들은 짧게는 몇십 년에서 길게는 몇백 년을 일관된 브랜드 철학과 이미지를 갖고 있는 브랜드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백 년이 훌쩍 넘은 작은 찻집도,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오래된 사탕가게도 더 많이 판매하기 위해 브랜드의 철학을 바꾸거나 더 멋져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면서 더 좋은 제품, 더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명품 조명 브랜드 PH램프를 디자인 한 폴 헤닝센은 30살에 루이스 폴센과의 파트너십을 시작해서 그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평생을 함께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백 년 넘게 그 명성을 이어갔다.

이런 사례에서처럼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해서 브랜드의 철학과 이미지를 바꾼 브랜드는 몇 년 동안은 흥행하는 브랜드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몇십 년, 몇 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좋은 브랜드로 남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랜 기간 사랑받는 잘 만들어진 좋은 브랜드는 기업의 경쟁력을 넘어 이제는 국가의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덴마크는 우리가 들으면 쉽게 알 수 있는 Lego, Bang & Olufsen, Bo Concept, HAY, Bodum, Vipp, Pandora, ecco, Carlsberg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브랜드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1/10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인 덴마크가 이런 좋은 브랜드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좋은 품질의 제품으로 오랜 기간 일관된 브랜드 철학을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브랜드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당연히 백 년 이상 사랑받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단기적인 이슈나 필요에 의해 브랜드를 만들지도, 철학을 바꾸지도 않는다.

코펜하겐 시내의 Lego매장과 Ecco매장의 모습

덴마크라는 나라를 설명하는 수식어 역시 참 많다.

행복한 나라, 동화의 나라, 낙농강국, 복지국가, 자전거의 나라...

이 모든 단어들이 덴마크라는 나라를 수식하는 말이다. 이 수식어만 들어서는 마치 꿈의 도시처럼 생각되겠지만, 덴마크에 살면서 처음에는 불편하고 힘들기만 한 나라에 왜 이런 수식어가 붙어있는지 의아했다.

덴마크는 낙농국가로 알려져 있어 자칫 땅이 비옥하고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닭고기와 돼지고기, 유제품들을 제외하고는 정말 먹을 것이 별로 없다. 행복의 조건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거리인데, 덴마크는 척박한 땅 때문에 국가에서 아무리 개간작업을 열심히 해도 일조량이 적고 흐린 날씨에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 날씨까지 더해져 그곳에서 생산되는 채소나 과일들은 정말이지 맛이 없다. 유기농이고 건강식 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오이소박이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물러버리는 오이와, 사각거리지 않는 퍼석퍼석한 사과, 단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딸기, 그리고 무 같은 채소는 재배가 불가능한 덴마크 생활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상황이라고 다. 그렇지만 여전히 땅이 비옥하지 않아 한번 채소를 수확한 땅은 몇 년간 농작물을 심을 수 없는 곳도 많았다.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오는 몇 가지 채소들이 있었지만, 가능한 덴마크산 농산물을 공급하는 걸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가끔 날씨에 문제가 있거나 사람들의 소비가 늘어나는 시즌이 되면 슈퍼마켓의 신선코너는 여지없이 텅텅 비어버린다.

외식비가 비싸 밖에서 사 먹기 조차 힘들지만, 대부분의 덴마크 사람들은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식재료를 미리 사놓지도 않을뿐더러, 많이 팔리는 품목을 많이 가져다 놓지도 않는 상점들이 더 신기했다. 그리고 상점 주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금씩만 사가라고 말한다.

그런 불편함에도 덴마크 사람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유기농 채소와 과일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인내심과 수고는 덴마크를 유기농 강국으로 만들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그곳에는 100년도 훌쩍 넘은 고풍스럽고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런 건물들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마치 동화의 나라처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건물들에 반해서 덴마크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불편함들이 존재한다.

옛 건물을 부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국가의 정책 때문에 덴마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들이 많고, 낡은 건물에 함부로 페인트칠도 할 수 없다. 물론 주차가 어려운 곳들도 많고, 그건 모두가 국민들이 떠안아야 하는 불편함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불평하는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이제는 자동차 도로 보다도 넓은 자전거 도로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깔려있는 나라가 되었다.

Strøget 거리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의 모습과 차도보다 넓은 자전거 도로의 모습

누구나 오후 4시가 되면 퇴근을 해서 가족들과 저녁시간을 보내야 하고, 휴가시즌이 되면 여행을 가고  휴식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남들에게도 야근이나 추가 근무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게 그들이 부족함을 견디는 이유이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이 만드는 건 환경에 부담을 주기도 하고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쓸 수 있는 건물을 불편하다고 부수는 일도,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역사와 전통을 허무는 일도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만의 행복이 아닌 모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묵묵히 불편함을 견디면서 자신들의 경쟁력과 이미지를 만들고, 꿋꿋하게 자신들의 철학을 지키면서 조금씩 불편함을 개선해 나간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또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일에도 열심이다.

적은 인구 때문인지, 그들의 존재가 점점 잊혀 가는 걸 우려하는 것 같았다.

덴마크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 있다.

유명 관광지 몇 곳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영어를 병행 표기하지 않는다. 모든 교통표지판과 안내 메시지가 덴마크어로 되어있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제품의 후면에도 영어를 병행 표기하지 않는다. 언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덴마크어를 모르면 도대체 이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덴마크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영어가 익숙하고 편리해지면 자국어는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이기에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전 세계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들 중 네덜란드 다음으로 2번째로 영어를 잘하는 나라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들이지만 자국어를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참 대단하다.

뿐만 아니라 덴마크의 국기 이미지를 좋아하고 많이 활용한다.

집 근처 마트에만 가봐도 쉽게 알 수 있는데, 마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덴마크 국기를 한 백개쯤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과 제품에 무조건 덴마크의 국기 이미지를 붙인다.

덴마크산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냥 국기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국기를 활용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지역의 작은 행사나 학교 행사, 심지어 자신들의 생일 케이크에도 작은 국기들을 꽂는다.

우리가 덴마크를 떠나오던 그때에도 딸의 학교 친구들은 덴마크 국기에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한 메시지를 적어서 딸에게 선물로 주었다. 마치 독립투사들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태극기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긴 것처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선물이었지만, 그들은 한국사람들처럼 굳이 비장한 각오가 없이도 늘 국기를 가까이할 뿐 아니라 잘 활용한다.

덴마크 국기를 잘 활용하고 있는 모습

덴마크 사람들은 국가의 브랜드나 이미지도 하루아침에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의 노력이 쌓여야 국가 브랜드도 철학이 생기고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불편함을 참고 오랜 기간 자신들의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국민들의 노력이 모이고, 오랜 시간이 쌓여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고,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가 되었으며, 건강한 먹거리가 많은 유기농 강국이 되었다.

덴마크의 국가브랜드를 만들고 디자인 한건 바로 덴마크 국민들이었다.





*이 곳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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