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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Jan 13. 2021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스토리를 담은 이미지, 이미지가 보이는 스토리

오랜만에 아침부터 햇살이 가득한 날이다.

산이 없고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여서 바람이 많이 부는 덴마크의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린다.

오전에 햇빛이 가득해서 오늘은 날씨가 좋겠구나 하는 날도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바람이 먹구름을 몰고 와서 비가 내리기도 하고, 오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다가도 어느새 바람이 비구름을 저만치 몰고 가버려서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하게 개는 게 덴마크의 날씨다.

그래서 햇빛이 조금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바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햇빛을 쪼일 수 있기 때문에 햇빛이 비치는 날이면 바닷가는 물론 공원에도 오랜만에 햇빛을 쬐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나도 햇빛이 비추면 자주 밖으로 나가곤 했는데,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가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친구가 하나 있다.

바로 백조들이다.

순백색의 눈부신 백조들도 햇빛을 쬐러 밖으로 나온다.

가끔 운이 좋으면 어린 아기 백조들도 같이 만날 수 있는데, 아기 백조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미운 아기오리'에 나오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엄마 백조와 회색빛의 못생긴 아기 백조의 모습.

덴마크에 살면서 가장 많이 생각났던 것이 어린 시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안데르센의 동화들이었다.

덴마크의 곳곳에 안데르센 동화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미운 아기오리를 생각나게 하는 눈부신 백조의 모습은 가장 인상적이었고 심지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오히려 동화책에서 글로만 읽었을 때보다 동화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성인이 된 백조와 아기 백조의 모습을 실제로 비교하면서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나를 다시 동화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햇빛이 비추면 어린 딸을 데리고 자주 백조들의 모습을 보러 밖으로 나갔었다.

코펜하겐에서 만난 백조들의 모습

덴마크 사람들을 비롯한 북유럽 사람들은 그들만의 중요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아기오리 속에도 그들만의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삶의 철학은 그들에게 겸손과 배려를 가르치는 교육의 기본이 되기도 하고, 특별히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 모여 함께 만들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삶의 자세가 되기도 하는데, 이 철학을 그들은 '보통사람의 법칙 또는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라고 부른다.


Jante lovens 10 bud:

얀테의 법칙 10 계명

1. Du skal ikke tro, du er noget.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2. Du skal ikke tro, at du er lige så meget som os.

   당신이 다른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3. Du skal ikke tro, at du er klogere end os.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Du skal ikke bilde dig ind, at du er bedre end os.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났다고 확신하지 마라.

5. Du skal ikke tro, at du ved mere end os.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Du skal ikke tro, at du er mere end os.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Du skal ikke tro, at du dur til noget.

   당신이 무엇이든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Du skal ikke le ad os.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마라.

9. Du skal ikke tro, at nogen bryder sig om dig.

   누군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Du skal ikke tro, at du kan lære os noget.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든 가르치려 들지 마라.


덴마크계 노르웨이 작가인 악셀 산데모세(Aksel Sandemose)가 풍자소설 '도망자'(A Fugitive Crosses His Tracks, En flyktning krysser sitt spor, 1933)에서 묘사한 가상의 덴마크 마을인, 얀테의 10가지 규칙에서 유래한 것인데, 자세히 읽어보면 스스로를 남들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더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 사람들은 평등해야 한다는 말을 10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Wikipedia 참조)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돼며,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생각이 이 법칙 안에 그대로 담겨 있다. 덴마크 사람들이 개인의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오래전부터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초등학교 교육에서도 얀테의 법칙을 실천하는 몇 가지 규칙들이 존재한다.

가령, 생일에 같은 반 아이들 중 친한 친구 몇 명만 초대하지 못하게 한다든지, 처음 전학 온 학생에게 도움을 주는 도우미 역할을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맡도록 하기도 하고, 가장 친하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의무적으로 플레이타임을 갖게 하는 제도 같은 것들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얀테의 법칙은 안데르센의 동화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백조가 된 미운 아기오리의 이야기나, 공주와 결혼한 바보 한스의 이야기, 우쭐한 사과나무가지의 이야기, 외다리 주석 병정의 이야기, 그리고 다섯 알의 완두콩 이야기 등 안데르센 동화의 많은 이야기들이 남들과 다른 외모를 가진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남들로부터 소외되어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얀테의 법칙을 근간으로 독자들에게 교훈을 남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역시 원래 배우가 꿈이었지만, 어려운 형편과 자신의 돋보이지 않는 외모와 목소리 등으로 인해 배우의 꿈을 접었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미운 아기 오리에 비유해서 동화를 썼다고도 전해진다.

안데르센의 주석 병정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카이보예센의 'The Royal Guard'

재미있는 스토리는 좋은 명언보다 사람들에게 더 빠르게 전달되기도 하고, 글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을 오래 기억시키기 때문에 교훈을 주기에 훨씬 효과적이다. 어린 시절 읽은 명언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미운 아기오리 이야기는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스토리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백조의 모습을 보고 미운 아기오리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듯이, 연상되는 이미지를 보게 되면 어김없이 스토리는 다시 떠오른다.

잘 된 디자인 역시 이미지 속에 스토리를 담고 있으며, 스토리를 담고 있지 않은 디자인은 오래 기억되지 못한다.

이처럼 이미지와 스토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어 서로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강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안데르센은 이야기를 완성하기 전 자신이 쓰고 있는 스토리를 비주얼로 만들어보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특히 그는 배우가 꿈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글의 내용을 가지고 마치 연극을 하거나 디자인을 하는 것처럼 스토리를 비주얼화 해보았던 것이다. 오덴세에 있는 안데르센의 박물관에 가보면 그가 자신의 스토리를 비주얼로 만들어놓은 작품들이 가득하다. 그가 만든 비주얼들을 보고 있으면 놀랍게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또다시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스토리를 이미지로 만들어 보는 그의 놀라운 상상력이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창의적인 이야기를 쓰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상상하고, 이미지를 보면서 또 자연스럽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스토리와 비주얼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안데르센의 상상력은 그가 가진 가장 놀라운 능력이기도 하고, 디자이너들에게는 꼭 필요한 역량이기도 하다.

디자이너도 안데르센처럼 스토리를 비주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덴마크에 살면서 디자이너인 나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사람은 덴마크의 디자이너들이 아니라 바로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이었다.

안데르센 박물관의 안데르센 동상과 비주얼 작품들
 안데르센 박물관에서 만난 안데르센의 비주얼 작품들




*이 곳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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