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어는 배우기가 참 어렵다.
보기에는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지만 뜻도 발음도 차이가 많다. 특히 발음만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조차 없다. 말을 하다 만 것 같기도 하고, 발음이 잘 들리지도 않는다. 흉내조차 내기 어려워 덴마크어는 마치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물고 하는 발음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의 언어 중 가장 배우기가 어려운 언어에 속한다는 말을 듣고 난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전 세계에서 겨우 550만 명 정도의 덴마크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하고 배우기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어서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가르치지 않으면 배우기 쉬운 영어에 밀려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덴마크어는 읽는 방법도 영어와는 많이 다른데, 'g'가 단어의 중간에 있을 때는 묵음이 되기 때문에 쓰기는 하되 발음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Dragør'의 경우도 덴마크 발음으로는 '드라괴르'가 아니라 '드레이어'에 가까운 발음이 된다.
덴마크 사람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들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히 잘 지켜나가는 사람들이다.
덴마크에는 코펜하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드레이어(Dragør)'라는 작고 오래된 어촌마을이 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마을이며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주해와서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덴마크의 전통음식인 청어를 잡아 청어 절임을 만드는 곳이기도 했었다.
어느 햇살 좋은 오후 친구들과 드레이어를 찾았다. 덴마크 아마(Amager) 섬의 서쪽, 카스트럽(Kastrup) 국제공항과도 멀지 않은 위치이고, 코펜하겐에서는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드레이어라는 작은 어촌마을이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노란 벽에 빨간 지붕을 한 덴마크의 전통 집들이다.
같은 느낌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만들고 작은 골목길을 만들어 걷는 재미도 있고 구경거리도 많다.
집집마다 심어놓은 나무와 꽃들, 문과 창가를 장식한 아기자기한 장식품들도 볼거리이고, 작고 아담한 영화관과 카페들에서도 예스럽고 이국적인 운치를 느낄 수 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높은 건물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바닷가 마을은 정박해 있는 보트들과 바닷물이 조화를 이루어 경치도 좋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을을 걷기도 하고, 작은 카페의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친구들과 맛있는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옛날 덴마크 사람들이 살던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은 마치 우리나라의 한옥마을과 비슷한 덴마크의 가장 전통스러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드레이어가 우리나라의 한옥마을과는 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드레이어는 덴마크의 대표적인 부촌이라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집값이 너무 비싸서 살 엄두도 못 내는 그런 곳이다. 물가가 비싼 덴마크는 집값도 꽤나 비싸서 좋은 집 한 채를 마련하려면 은행에서 빌린 돈을 평생 갚으며 살아야 한다.
물론 은행 이자도 저렴하고, 복지정책도 잘 되어있는 나라이지만 이곳도 역시 아무나 살 수 없는 부촌과 비싼 집들이 존재한다. 난 이렇게 아담하고 오래된 집들이 모여있는 드레이어 같은 전통마을이 부촌이라는 것이 참 신기했다. 흔히 부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높은 건물과 화려한 쇼핑센터, 그리고 사통팔달 교통망 같은 것들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에는 마트도 보이지 않았고 높은 건물도, 편리한 교통시설도 없었다. 한국의 시골마을처럼 보이는 작은 마을이 운치가 있어 보이긴 했어도 부족한 것이 많아 보이는 이곳이 어떻게 부촌이 되었는지 이 마을을 돌아보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그 궁금증은 떠나지 않았다.
Dragør 마을의 거리 풍경 노란 벽과 빨간 지붕, 그리고 짚으로 지붕을 덮어 전통 이미지를 살린 집의 모습 높이가 낮은 집들과 정감 있는 바닷가의 돌담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카페 몇 년 만에 한국에 와서 보니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들이 꽤나 인기가 있다.
어떤 제품이든 북유럽 스타일이라고 하면 가격이 비싸지고 잘 팔리는 것 같았다. 가구와 그릇들, 그리고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북유럽 스타일이라는 문구만 쓰면 모두들 부러워하고 갖고 싶어 한다. 심지어 그중에는 북유럽 스타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제품들도 많았다.
문화는 서로 교류하면서 발전하고, 나와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다양하게 진화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나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와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언택트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대중적인 것보다는 나에게 맞는, 나의 성향이 잘 반영된 제품들과 공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덴마크에서 전통을 잘 보존하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드레이어가 결국은 현대적인 도시보다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마을이 된 것처럼, 덴마크 사람들이 전통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나는 나대로, 우리는 또 우리대로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야 한다.
덴마크에서 우리나라 영화 '기생충'이 개봉을 해서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영화를 보았던 덴마크 친구가 나에게 물었었다.
영화 속에 등장한 한국의 부잣집이 덴마크 집들의 디자인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한국에 그와 비슷한 북유럽 스타일의 집들이 많이 있는지 물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무심코 보았던 영화의 주 무대가 된 집의 건축디자인이 정말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덴마크의 단독주택들의 디자인과 아주 흡사해 보였다.
난 한국에서 요즘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이 인기가 많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 친구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사랑받고 있는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에 자부심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난 디자이너로서 좀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덴마크 디자인은 전통을 유지하면서 그들만의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계속 진화해나가고 있는데, 우리의 디자인은 과연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잘 담아내면서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드레이어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코펜하겐 시내에 있는 디자인 백화점에 들렀다.
코펜하겐의 가장 중심지인 스트뢰에(Strøget) 거리 한복판에 있는 'Illums bolighus'는 덴마크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인 백화점이다.
그곳에 가면 덴마크 도시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일러스트 작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
'Martin Schwartz'라는 덴마크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인데, 덴마크 각 도시의 모습을 그만의 일러스트 스타일로 그려낸 멋진 작품이다.
다른 덴마크의 도시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떤 디자인의 건물들이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도시의 모습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은 그 도시가 일관성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파트 한 채도 30년이 지나면 재건축을 해서 새집에 살고 싶어 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몇 백 년 동안 같은 모습으로 도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내고 있는 그들의 노력이 의미 있게 다가온 날이다.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도시도 마찬기지로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게 마련이다. 나는 남들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 도시만의 차별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노력이 도시의 얼굴을 만들고 그 도시만의 정체성을 만들어준다.
덴마크 일러스트레이터 'Martin Schwartz'의 덴마크 도시의 모습을 담은 일러스트 작품들 덴마크 도시들의 특징을 살린 일러스트 포스터 / Image by martinschwartz.com
*이 곳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