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참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은데, 새해가 되면 일 년이 금방 지나가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일 년은 참 길게 느껴지는데, 또 십 년은 훌쩍 지나가 버려 어느새 10대가 된 딸의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가족이 덴마크에서 살았던 3년의 기간 동안은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어느덧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지나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잊혀 가고 있었다.
분명 시간은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는데 우리 생각 속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덴마크에서 어둡고 추운 날이 반복되는 6개월 동안의 겨울은 너무 느리게 돌아오는 주말을 기다리느라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지만, 눈부신 햇살과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6개월 동안의 여름은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 하루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덴마크 사람들은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겨울을 참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다.
덴마크 학교들은 겨울의 한 복판인 12월에는 3주간의 크리스마스 연휴가 있고, 봄을 기다리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4월이 되면 가뭄에 단비 같은 10일간의 부활절 연휴가 있어서 그 기간을 활용해서 여행을 많이 다닌다. 신기하게도 여행을 가면 시간은 더 쏜살같이 지나가 버려서 긴 겨울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속도는 매번 다르게 느껴지지만 시간은 아무런 죄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고, 어느 곳에서도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손꼽아 기다리는 날은 너무 느리게 오고, 빨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은 신기하게도 빨리 온다.
1년 중 덴마크 아이들의 시간이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달은 12월이다. 앞에서 말했던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느리게 오는 원리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12월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12월이 되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있는데, 바로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이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그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크리스마스날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음식 준비와 파티 준비로 무척이나 바쁘다. 집도 다시 꾸미고, 크리스마스트리도 장식하고 음식 준비도 해야 한다.
한국사람들이 설날에 먹는 떡국처럼 그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 있다. Flæskesteg라 불리는 덴마크 사람들의 전통음식인데, 껍질째 장시간 오븐에 구운 통삼겹살과 소금에 절인 붉은 양배추, 그리고 설탕에 졸인 감자를 곁들여먹는 음식이다. 그리고 후식으로 먹는 Risalamande는 쌀을 휘핑크림에 끓여서 아몬드를 넣어 만든 음식인데, 이 음식이 있어야 크리스마스에 하는 이벤트 중 하나인 통아몬드 찾기를 할 수가 있어서 크리스마스에는 꼭 준비해야 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덴마크 전통식단으로 차려진 크리스마스 파티 테이블
뿐만 아니라, 덴마크 사람 중에는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일 년간 열심히 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행사이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집에 모여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날이기도 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 큰 선물을 받는 날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린다.
11월이 되면 유럽의 상점들은 매장에 크리스마스 선물들을 가득 쌓아 놓고, 기업들도 크리스마스 선물용 제품들을 새롭게 출시해서 광고를 하느라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이렇게 중요하고 신나는 날이 크리스마스여서 12월이 되면 아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길고 지루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래서 덴마크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12월이 시작되기 전에 꼭 준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캘린더'이다.
크리스마스 캘리 더는 12월 1일부터 24일까지만 기록되어있는 캘린더로 날짜 뒤에는 매일 하나씩 주는 24개의 작은 선물들이 들어있다. 하지만 캘린더 속 선물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크리스마스를 지루하지 않게 기다리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날짜별로 하나씩 열어보면 나오는 작은 초콜릿이나 장난감, 그리고 이야기책 같은 것들로 크리스마스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용도일 뿐이다.
아이들은 하루에 하나씩 달콤한 초콜릿을 꺼내 먹거나 작은 장난감을 꺼내보면서크리스마스가 오려면 며칠이 더 남아있는지 세어보기도 하고,작은 선물의 기쁨을 느끼면서 지루한 마음을 위로받다고나 할까?
만일, 이 캘린더가 없으면 부모들은 매일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는 날짜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려줘야 하고, 급기야 하루에도 몇 번씩 왜 이렇게 날짜가 많이 남아있냐,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 선물을 미리 받으면 안 되냐 등의 질문을 해대는 아이들에게 언성이 높아질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크리스마스 캘린더 디자인
사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맥주회사들은 12월 1일부터 하루에 한 병씩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다양한 맥주를 맛볼 수 있는 크리스마스 캘린더 맥주를 출시하기도 하고, 화장품 회사들이나 초콜릿을 비롯한 디저트 회사들도 다양한 디자인의 크리스마스 캘린더를 출시해서 어른들의 지루함도 달래준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크리스마스 캘린더는 그냥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캘린더일 뿐 선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 캘린더가 주는 24개의 선물을 모두 받고 나면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찐 크리스마스 선물이 나를 기다린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는 덴마크는 물론,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하기도 하고 기다려지는 날이다.
그런 기다림 속에서 지루한 마음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가진 크리스마스 캘린더를 난 선물보다 더 좋아했었다. 11월이 되면 독특한 아이디어의 캘린더 디자인들을 보는 재미를 놓칠 수 없었다.
24일 동안 오늘은 어떤 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열어보게 되는 작은 박스나 칼선을 따라 뜯으면 나오는 선물을 받는 소소한 즐거움은 지루함을 달래주기도 하지만, 받을 선물을 미리 예측해보는 재미도 있다.
언젠가 코펜하겐의 5성급 호텔 D'Angleterre는 건물 전체를 크리스마스 캘린더로 장식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매일 하나씩 열리는 숫자에서 나오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아름다운 영상으로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지루한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크리스마스 캘린더에는 덴마크 사람들의 삶의 여유와 지혜가 가득 담겨있었다.
Hotel D'Angleterre의 크리스마스 캘린더 장식
덴마크 맥주회사 Thisted Bryghus의 크리스마스 캘린더 디자인
디저트 회사들의 크리스마스 캘린더 디자인
*이 곳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