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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ug 13. 2024

세입자가 있었는데, 없었습니다(105호)

세 안 살아본 어떤 유부녀 실습생 덕분에 뒷목잡은 썰

"징징이요? 지금 징징이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지방국립대 의대 캠퍼스가 있는 곳에서 임대업을 한다.

세입자는 주로 의대, 보건대, 간호대 등에 재학 중인 대학생들과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이들인데 학사 일정에 따라 세입자가 들고 나는 스케줄이 매년 반복된다.


학생들은 3월 입학 및 개학을 맞아 주로 2월에 방을 얻으러 다니는데 임대업자들은 이때 방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12월, 1월, 2월 석달간 방을 정비해서 중개업소에 내놓는다. 석달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건의료직 국가고시 중 마지막에 치러지는 간호사 국가고시가 1월말에 치러지기 때문에 그 전에는 미리 방을 보여주거나 정비를 할 수 없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거의 제2의 수능인 셈이라 세입자도 예민하고 특히 세입자 부모들이 나서서 자기 아이들(?)이 신경쓸 일 없도록 단도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2월 한달 내에 기존 세입자가 나가고 다시 그 방에 새로운 세입자는 입주를 해야 할 상황이라 임대인은 이 짧은 시간 안에 정비를 마쳐야 한다.


예외적으로, 실습 시즌이라는 게 있다. 대학병원이 있는 행정구역 이외 지역에 있는 의료보건계열 대학교에서는 실습이 가능한 인근 병원으로 졸업반 학생들을 실습을 보내는데 이때 학생들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가 아닌 탓에 실습병원 인근에 방을 얻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여름과 겨울 방학을 앞둔 5월, 10월쯤부터 방학 두달 동안 단기로 거주할 학생들이 방을 얻기 위해 분주해진다.


통상 우리 광역시에 있는 의료보건계열 재학생들만 실습을 오는 게 아니라 대학병원이 없는 인근 도시에서 모두 실습을 나오기 때문에 집에서 통학하거나 기숙사에 거주하지 않는 학생들은 단기로 방을 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리고 아니러니하지만 이때가 유일하게 집주인이 진짜 ‘갑’이 된다. 세입자를 골라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재학생과 병원 관계자들이 주로 살고 있는 대학병원 근처에는 두 달만 빌릴 수 있는 방이 거의 없다. 세입자가 군대에 가거나 이직을 하는 게 아니면 연중에 빈방이 나오는 경우가 없는데 두달짜리 단기 세입자를 받았다가 장기 세입자를 놓치게 될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방을 놀리느냐 단기라도 임대를 하느냐의 선택권은 임대인에게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가을, 갑자기 지방 도시의 보건계열 재학생이 실습을 위해 단기 방 임대를 문의하는 전화를 했다. 재밌는 건 전화를 한 이는 공인중개사를 통해서 전화한 게 아니라 온라인 지도의 거리뷰를 통해 대학병원 인근 지리를 확인하고 적당한 위치에 있는 건물주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직접 돌아보고 공인중개사를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전화를 하는 이들은 왕왕 있었는데 거리뷰로 건물에 적힌 전화번호를 따서 연락을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 학생은 10월부터 전화를 했다. 우리는 당시 빈방이 없었고 수선을 위해 비워둔 방만 두세 개 있을 뿐이라서 학생이 실습나오는 기간에 수리가 끝나면 세입자를 받을 수 있지만 그 전까지 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 뒤 다른 집에 먼저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잊었다.


이후 몇 주가 지나자 학생은 자기와 친구까지 각자 방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다른 집들은 빈 방이 없으니 꼭 좀 부탁한다고 사정을 했다. 어쩔 수 있나(단기 방 임대로는 내 용돈이었기 때문에 아주 신나게 일을 했지). 피곤하지만 도배, 장판, 싱크대 수리 등등을 차근차근 해나갔다.


12월이 됐다. 편의상 직접 전화를 했던 임차인을 ‘볼트’, 함께 실습을 오는 친구 임차인을 ‘망치’라고 칭하겠다. (볼트의 친구는 너트여야겠지만 나중에 보니 그런 관계가 아니어서 일단 세부 카테고리를 분류하겠음) 


방을 임대하는 임차인은 이사할 때 수도, 전기, 가스 세 가지를 신경써야 한다. 전기는 석달 전기요금이 밀리는 게 아니라면 일방적으로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계량기로 확인해서 와트당 사용요금을 내면 된다. 수도는 단기일 경우 계량기의 사용량 체크해서 리터당 요금을 별도로 부과한다. 몇 천원 정도라서 보통 단기일 때는 관리비로 퉁친다. 문제는 도시가스다. 도시가스는 세입자 본인이 개통을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6시 전에 직접 전화해서 사용 요청을 해야 한다. 여름이면 모르지만 겨울엔 난방, 온수 다 못 쓰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도시가스 연결에 대한 안내는 공인중개사도 알려주고 임대인도 알려준다. 남편은 볼트에게 이 사실을 고지했고 망치에게는 볼트가 전달했다고 했다. 


망치는 실습을 시작하기 전 토요일부터 와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가스공사에 전화해서 입주 준비를 마쳤다. 출근하기 일주일 전부터 박스로 포장된 짐들이 집 앞에 쌓이는 것부터 계약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반면에 볼트는 다음 월요일부터 실습이라고 했는데 전날 일요일에도 연락이 없었다.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실제로 방을 보지도 못했고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보증금을 미리 받았고 같이 실습한다는 친구가 먼저 입주한 상태라서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마음이 있긴 했다. 그래도 몰라서 연락을 했다.


"어디쯤 오세요? 저희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계약서 작성은 나중에 할까요?"

"아, 제가 좀 늦게 출발해서 6시 넘을 것 같아요. 도착해서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볼트는 도시가스 연결도 하지 않은 채 7시 다 되어서 도착했고 마트에 있던 우리에게 전화로 보일러가 되지 않는다면 항의했다. 도시가스 연결해야 하니 6시 전에 오라고 안내드렸다고 했더니 그런 말을 들은 바가 없단다. 대신 전달한 망치는 미리와서 다 연결했는데 연락 안해보셨냐고 했더니 그때부터.....


"저한테 말씀을 해주셔야죠. 아이랑 같이 왔는데 난방도 온수도 안 되면 어떡해요!"

"아이요? 그런 얘기 없으셨잖아요."

"아이가 너무 안 떨어지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병원으로 실습나오셨다면서요."

"제가 출근해 있는 동안 아이는 얌전히 혼자 있을 거예요. 밤에 저랑 같이 있고요."

"네?"


우리 건물은 모두 주방과 방이 분리된 1.5룸이지만 아파트보다는 방음이 안 좋은 상황이다. 그래서 반려동물도 가급적 못 키우게 한다. 주변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풀옵션인 방에서 유일하게 없는 게 텔레비전인데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집에서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혼자 있다가 울기라도 하면? 아니 그보다 아이가 안 떨어져서 데리고 왔다면서 아이를 두고 출근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지?


"어떡해요. 이렇게 추운데 진짜..."

"그래서 저희가 말씀드렸잖아요. 너무 늦게 오시니까 중간에 전화도 한 건데요."

"중간에 전화할 때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통화를 하는 중에 옆에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이와 남편 둘다 온 것 같았다.


"이사 안 해보셨어요? 도시가스는 세입자 본인이 직접 연결해야 하는 거 모르셨어요?"

"몰랐어요. 세 안 살아봐서."


아... 진짜 이게 무슨 경우인지. 본인도 남편과 상의를 하는지 전화를 걸었다가 다시 끊었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장 내일 출근이라니 우리집에서 재울까 싶기도 했다. 아니면 친구 집에서 오늘만 신세를 지면 어떻겠냐고도 물어봤다.


"친구 아니거든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친구랑 같이 실습을 오게 돼서 방을 2개 구한다고 하더니 고지사항 전달이 제대로 안 됐다고 이제는 그 친구가 친구가 아닌 게 됐다. 이렇게 된 이상 '망치'의 방에서 하루 의탁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 된 거다.


"아니 근데요, 저희는 미리 다 안내 해드렸고, 그래서 친구분은 미리 알아서 잘 들어왔는데 정작 본인은 들은 적 없다고 하고. 왜 저희한테 이러세요? 지금 이 상황에서 저희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아니 그렇잖아요. 도시가스를 미리 연결해야 된다고 꼭 6시 전에 와야 한다고 얘기를 해주셨어야죠."

"했잖아요. 중간에도 연락하고."

"몰랐죠. 도시가스 얘기를 해주셨으면 일찍 왔죠."

"이보세요. 본인이 사정사정해서 방 만들어 드렸잖아요. 왜 저희한테 징징대시는 건데요?"


전화를 30분 넘게 들고 있다 보니 짜증이 나서 버럭 질러버렸다. 똑같은 얘기를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건가. 게다가 도시가스 연결 안 돼서 난방과 온수를 사용할 수 없는 현재 상황을 해결할 어떤 방법을 찾아야지 진짜 말 그대로 '징징'대기만 하면 어쩌라는 건지. 일단 오늘밤이 걱정돼서 우리 집에서라도 재우자 했던 마음이 천리는 달아나버렸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징징이요?"

"네. 이게 지금 징징거리는 거지 뭐예요. 다른 방 구하세요. 저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네요. 부동산 통해서 온 것도 아니고 방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보증금 바로 내어드릴게요. 그냥 내일 다른 방을 구하세요. 저희가 더 해드릴 게 없네요."


여자는 충격을 받은 거 같았다. 우리도 좀 심했나 싶었지만 세입자의 첫인상은 꽤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우리 나름의 경험으로 이 세입자는 안 받는 게 낫다고 결정했다. (왜 이런 경험이 쌓였는지 지금 읽고 계십니다 -.-) 살면서 얼마나 더 힘들 게 할지 모를 사람은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면 연락달라고 한 뒤 우리는 마저 볼일을 봤다. 무엇보다 함께 왔다는 아이가 내내 걸렸다. 두세 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서 온 것 같은데 이 시간에 다시 돌아가기에는 무리일 테고 내일 출근도 한다니 근처에 모텔에서 자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일단 결정은 볼트의 몫이니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볼트는 내일 짐을 옮기겠다고 했다. 


"근데요, 징징거린다는 말은 좀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요. 병원 실습나온다는 학생이 사전에 말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오질 않나, 그 아이는 출근할 때 혼자 있을 거라고 하고. 도시가스 사용 시스템을 이해 못하는 건 알겠는데 세 안 살아봐서 모른다는 게 지금 말이 됩니까. 이런 게 처음이면 미리 와서 확인해야 맞지 않아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볼트는 아무튼 내일 짐을 옮기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어디로 갔는지 이미 들고온 짐을 모두 가지고 가버렸다.




볼트는 그렇게 가버렸고, 졸지에 친구에서 탈락한 망치는 두달의 실습 기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다가 돌아갔다. 망치가 사용하던 방은 그 뒤로도 계속 단기 임대로 나가면서 나의 피와 살이 되어 주었으며, 볼트 덕분에 미리 손봐둔 105호는 2주 후 나이지리아에서 온 간호대 석사 과정 학생이 입주한 뒤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


이게 우리가 '을' 같은 건물주가 유일무이하게 해본 '갑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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