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기' 랑 같이 사는 바퀴벌레 퇴치 썰
"우리 애가 바퀴벌레를 너무 무서워해서 그러는데 좀 잡아주시죠."
몇 살이 되면 혼자 부동산을 계약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자면 나는 스물 다섯 살에 대학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부동산을 이용해봤다. 그 전에는 부모님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편하게 컸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우리 건물에 사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시절 공부 좀 했던 친구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의료보건계열 커트라인이 내 전공인 문예창작보다는 늘 높았던 것 같음) 공부는 잘 할지 몰라도 그 외에 생활적인 면에서는 신생아랑 다를 바 없다고 봐야 골치가 덜 아프다.
예를 들어 환기 문제. 근데 돌아보면 나도 20대 때는 집에 환기를 시켜야 되는 걸 잘 몰랐다. 여자 혼자 사는데 나갈 때마다 창문 활짝 열어놓는 건 절대 안 될 일이고 화장실에 습기가 가득 차도 그냥 문을 닫아뒀지 열어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쓰면서 예전의 나를 돌아 보니.... 진짜 멍청했네 -.-
옷에서 물비린내가 나는 건 빨래를 실내에서 말리기 때문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실내에서 빨래를 말리면 물비린내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특히 그 습기가 온 집안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겨울에는 옷, 이불, 벽지, 가구 등등 온 집안에 검은 곰팡이를 퍼뜨린다. 바꿔 말하면 환기만 잘 시켜도 아무 문제 없는데 이 간단한 걸 안해서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상황을 유발하는 거다.
벽에 곰팡이가 핀다는 민원을 몇 번 받고나서 우리가 찾은 노하우는 벽지를 페인팅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벽지는 도배업자를 불러서 하지만 페인팅은 남편이 직접 한다. 남편은 해군 출신인데 주특기(?)가 페인팅이다. 해군은 배타는 사람이 아니라 정비하는 일을 주로 한다면서 진해에서의 군생활 내내 배에 페인트를 칠했단다(+남편은 수영 배운지 5년 밖에 안 됐다. 해군 시절엔 수영 못했다는 얘기. 헉) 군대에서 배운 걸 써먹는 사람 처음 보는데 아무튼 그리하여 우리는 겨울만 지나면 방마다 창궐하는 검은 곰팡이로부터 집을 지킬 수 있게 됐다.
실습 시즌도 아니고 입학 시즌도 아닌 애매한 5월쯤 인근 도시에서 이곳 대학병원으로 취업인지, 이직인지 모를 이유로 20대 여성 한 명이 방을 얻었다. 보통 20대 젊은 여성이 혼자 방을 얻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 나이에는 부모님과 같이 와서 집을 둘러보고 계약자 이름도 부모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20대는 혼자 부동산 거래하기엔 서로 좀 이르다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한다. 세입자는 기존에 있던 곳이 많이 시끄러워서 조용한 곳을 찾는다고 했다. 건물 내 세입자들 모두 학생 아니면 직장인이라서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자는 수준이라 시끄러울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입주한 첫날부터 남편의 카톡이 울렸다.
- 물 내려오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데 어떻게 좀 안 될까요?
갑자기 무슨 물 내려가는 소리? 아~ 아마도 윗집 어딘가에서 설거지나 빨래를 하면서 배관으로 물이 내려가는 소리인 것 같은데 그게 크게 들렸지 싶었다. 예전에 아파트에만 살았던 내 경험에 비춰봐도 세탁기 놓인 뒷베란다에 붙어있는 방은 가끔씩 배관 타고 흐르는 물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뒤로도 2,3일 간격으로 다양한 소음 민원을 계속 제기했다.
우리는 대부분 공동주택에서 산다. 그래서 내 사적인 공간에 머물고 있지만 주변에서 나는 소음들,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내는 다양한 소음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인한 사회 문제는 이미 10년도 더 된 이슈지만 문제만 있고 답이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원룸 건물이라고 해서 소음이 더 심하거나 덜 심하거나 하지는 않다. 우리가 익숙해져서 소음에 둔해졌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201호는 밤마다 카톡, 카톡 자꾸만 울려댔다. 물 내려가는 소리가 시끄럽고 옆집이 잠을 안 자는지 시끄럽고 등등등.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어이없는 카톡이 왔다.
- 201호 아이 아빠입니다.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는데 가서 좀 잡아주세요.
남편이 임대업을 하면서 가장 공포스러워 하는 부분이 바로 바퀴벌레다! 바퀴벌레가 너무 싫어서 세스코에서 사용하는 약으로 건물 곳곳에, 방마다 싱크대며 베란다까지 철저하게 바른다. 남편이 바퀴벌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슬쩍 지나가는 것만 봐도 바퀴벌레의 국적을 알고 주요 서식지와 먹이까지 파악하고 있다. 간략히 말하면 먹바퀴, 독일바퀴, 미국바퀴, 일본바퀴 등이 있는데 주로 외부에 서식하는 바퀴는 독일바퀴로 사이즈가 크며 먹바퀴는 실내 서식하는 종이다. 아니아니 다 필요없고 아무튼 집에서 바퀴벌레 나오면 남편은 나를 부른다. 여보!!! 바퀴바퀴바퀴바퀴..... (의자 위로 올라가버리고 내가 때려잡아 변기에 넣음)
바퀴벌레가 나오면 누가 잡아야 할까. 201호 세입자의 보호자는 이사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으니 집주인이 바퀴벌레를 잡아줘야 한다고 했다. 반면 남편은 이 건물에 이제까지 바퀴벌레가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바퀴벌레는 201호 때문에 생겼고, 바퀴벌레의 특성상 그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집에도 퍼졌을 거라고 했다.
아니 그보다 바퀴벌레가 나왔다고 밤늦은 시간에 집주인에게 바퀴벌레를 잡아달라는 세입자는 처음이었다. 집에서 벌레 나온다고 집주인 호출하나? 집에는 거미도 살고 개미도 살고 그리마도 사는데 그럴 때마다 집주인이 잡아줘야 한다고?
일단 다음날 바퀴벌레 약을 설치해주기로 하고 그 밤에는 대화가 마무리 됐다. 201호의 보호자인 부모가 주말에 집에 올테니 한번 보자고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남편은 이미 사색이 됐다. 그렇게 싫어하는 바퀴벌레를 봐야 한다는 상황이 절대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 날 우리는 치약처럼 생긴 세스코의 바퀴박멸제를 들고 201호를 방문했다. 세입자가 출근한 이후에 약을 설치하겠다고 미리 말은 했지만 남편은 절대 여자만 있는 집에 혼자 가지 않기 때문에 나와 동행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생각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현관에 쓰레기봉투 50리터짜리가 있는 게 아닌가!
일반 가정에서는 대부분 20리터 종량제 봉투를 사용하지 않나? 쓰레기가 쌓이는 게 싫으면 10리터를 사용하기도 한다. 남편과 내가 20리터 쓰레기 봉투를 채우기까지 3~4일이 걸리는데 1인 가구가 50리터 종량제 봉투를 쓰면 대체 며칠 동안 현관에다가 저 쓰레기 봉투를 두고 쓴단 말인가. 우리는 그 50리터 용량의 쓰레기봉투를 보고 이 집이 바퀴벌레의 발산지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게 됐다.
침대와 옷장, 싱크대 아래, 신발장, 베란다 등등 바퀴벌레가 지나다닐 만한 곳에는 엄지손톱만한 캡에 넣은 바퀴약이 담겨 놓였다. 남편은 미리 바퀴더러 도망가라는 듯 여기저기 톡톡 치면서 경고를 했다. 싱크대를 열었는데 바퀴가 튀어나올까봐, 벽지와 장판 사이 틈에서 바퀴가 나올까봐 툭툭, 톡톡 노크를 하고 약을 뒀다. 무슨 남자가 벌레를 이렇게 무서워할까 싶지만 모든 벌레를 겁내는 건 아니니까 뭐.
그렇게 바퀴벌레 퇴치제를 설치하고 다른 세입자들에게 혹시 바퀴벌레가 나온 집이 있는지 물어봤다. 건물 전체에 약을 한꺼번에 놓지 않으면 어느 한 집으로 몰려가기 때문에 이렇게 된 이상 한꺼번에 하자 싶기도 했다. 솔직히 바퀴벌레 나오는 건물이라는 이미지가 좋은 건 아니라 놔둘까 싶기도 했는데 우리도 그 건물 4층에 살고 있기에 바퀴벌레로부터 안전하려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다행히, 201호 빼고 바퀴벌레가 출몰한 집은 없었다.
일요일 오후가 되었다. 201호 세입자 부모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201호로 갔다. 우리가 갔을 때보다 집 상태는 훨씬 깔끔해져 있었다. 뭔가....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듯한? 하지만 화장실 바닥의 살구빛 물때는 못 치웠더만.
- 아니 솔직히 우리 애가 바퀴벌레 무서워하는데 좀 잡아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여자의 아버지가 먼저 말을 던졌다. 남편은 이런 언쟁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 나랑도 붙으면 말 잘 못하는데 이럴 때는 같은 편이니까 내가 나서기로 해서 - 내가 받아쳤다.
- 아니 그렇게 치면 못 잡아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저희가 해야할 의무가 아닌데요. 그리고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남편도 바퀴벌레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안 잡아준 게 아니라 못 잡아준 거고요.
- 그게 말이 됩니까?
- 이건 말이 됩니까? 따님 이사오기 전에 이 건물에 바퀴벌레 없었습니다. 이사온 날부터 물 소리가 시끄럽네 어쩌네 밤마다 어찌나 연락을 하는지.....
- 집이 이러면 해결을 해주시는 게 맞는 거잖아요.
- 아파트 사시면 알겠지만, 공동주택에 다들 하수 배관 있습니다. 뒷베란다 쪽 방에는 하수관으로 물 내려가는 소리 들리잖아요. 그리고 밤10시 넘어서 연락하는 건 대체 무슨 매넙니까? 9시, 10시 본인이 그때 퇴근했어도 그 때는 남의 집에 연락하는 거 아니지 않나요?
보다못해 여자의 엄마가 남자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고 대신 말을 이었다.
- 지금 문제가 바퀴벌레가 나오는 거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좀 얘기했으면 좋겠네요.
- 네 그러시죠. 바퀴벌레가 나온 게 임대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면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저희가 임대업 10년 이상 하는데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해서 좀 당황스럽네요.
- 저희도 세 주고 있어서 알고 있어요.
- 그럼 잘 아시겠네요.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요. 남편 분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하셨는지 말이죠. 저희도 부동산이나 법령 통해서 이런 경우 책임소재가 어디인지 확인해 볼테니 그쪽도 찾아보시고 다시 얘기하시죠.
- 아니 그럴 거 없고 그냥 저희가 방 옮기겠습니다. 부동산에 집 내놔주세요.
안 그래도 피곤한 세입자가 나간다는 말에 남편이 나섰다.
- 그러면 일단 방은 부동산에 내놓겠습니다. 근데 8월에는 방이 잘 안 나가는 시기라서 바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남은 계약 기간 중 절반인 11월까지 세입자 못 구하면 복비 없이 그냥 나가셔도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건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애매한 시기에 들어와서 애매한 시기에 나가는 거라 우리도 손해가 있지만 밤마다 울리는 카톡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감수할 수 있겠다 싶었다.
부동산 중개 수수료에 대해서 말하자면 세입자와 임대업자는 공인중개사에게 주는 수수료율이 다르다. 보통 세입자가 5~8만원 정도 주고 구하는 집이라면 임대업자는 15~20만원을 준다. 분명히 법적으로 명시가 되어 있는데 말로 먹고 사는 부동산 업자들은 - 몰랐는데 공인중개사는 방 보여주러 안 다니더라. 그 밑에 자격증 안 따고 영업뛰는 젊은 직원들이 있다 - 세입자에게 법대로 받고 임대업자에게는 어떻게든 더 받아간다. 아마도 공인중개사 자격자에게 법정수수료를 내고 나머지를 영업직원이 갖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임대업자 입장에서는 건물에 붙은 주인 번호로 연락해서 방을 얻는 세입자를 더 선호하고 말만 잘 하면 월세를 깎아주기도 한다. 1년 계약 기준으로 월 1만원씩 덜 받아도 중개수수료 안 냈기 때문에 손해가 아닌 것이다.
하여 우리는 드디어, 결국, 마침내 201호와 11월에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한대로 그 뒤 방이 나가지 않았지만 밤에 울리는 카톡도 없었고 무엇보다 바퀴벌레도 없었다.
나의 하나뿐인 공주님이 가장 무서워하는 바퀴벌레가 나왔는데 당장 주인집에서 그 바퀴벌레를 안 잡아주면 야속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201호 아버님의 자식 사랑을 우리가 공감하기에는 우리 사이에 너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암튼 201호 세입자였던 그녀는 직장이 근처인 것 같은데 바퀴벌레 안 나오고 하수관으로 물 내려가는 소리 안 들리고 이웃이 조용한 좋은 집을 찾길 바란다. 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