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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마음 Dec 27. 2021

[머문 자리] 그 겨울밤의 곁

김치서리



겨울이 되기 전 집집마다 한 철 양식을 준비하듯 김장을 한다. 김치냉장고가 나오면서부터 김장하는 시기가 빨라지기도 하고, 애초에 김장을 하지 않는 집도 있다. 식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김장하는 날은 잔두리(동네 이름) 잔칫날이었다. 누구네 집 김장을 한다고 하면 아지매(아주머니의 방언)들이 제각각 앞치마를 두르고 김장하는 집 마당으로 모였다. 김장을 하는 내내 웃음꽃이 피고 시끌벅적했다. 김장을 다 버무리고 나면 땅에 미리 묻어 놓은 항아리에 보관을 한다. 여기까지 마무리가 되면 갓 버무린 김장 김치와 동탯국을 끓여 죽 둘러앉아 한 솥밥을 먹기도 했다. 요즘은 앞집 옆집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른다. 하물며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도 서로 낯선 사람이다. 김장을 하는 날 내 일처럼 도우러 가거나,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풍경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곁이 없다.


겨울이면 붉은 해는 여름보다 더 빨리 제 몸을 불사르며 서산으로 꼴까닥 사라졌다. 해가 떨어질 즈음이면 앞산에서 들리는 부엉이 소리는 차가운 겨울밤을 더 재촉하는 것 같았다. 방문의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추운 날이면 밤하늘의 별들은 유난히 더 빛났다. 빛이 나다 못해 총총 박힌 별들은 까만 하늘을 죄다 구멍을 내고 쏟아질 것 같았다. 이런 날에는 어김없이 대문간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이는 친구의 목소리가 반가웠지만 엄마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방문을 나서지 못했다. 식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친구는 방 밖 가까이 와서 불렀다.


“엄마~, 향숙이가 부르는데 나갔다 와도 되여?”

“밤에 어디 가여?”

“아니. 방학이라서 낼 학교도 안 가잖아. 친구들이랑 조금만 놀다 올게. 응?”


엄마는 향숙이와 인숙이가 밖에서 떨며 기다린다는 걸 아니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그럼 조금만 놀다 와여. 오래 놀지 말고.”

“알아여.”


식이는 엄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갔다. 겨울밤이면 어른들도 동네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 화투를 치거나 윷놀이를 했다. 아이들도 또래끼리 모여 긴긴 겨울밤을 노닥거리며 보냈다. 보름이 멀지 않았는지 밤하늘은 휘영청 밝은 달빛으로 가로등이 무색했다. 부엉이 소리에 무서워 밤만 되면 꼼짝도 못하던 식이도 달밤에 친구들과 놀러 가는 길은 무섭지 않았다. 그날 밤은 잰말랑(동네에서 가장 꼭대기)에 사는 연희네 집에서 놀기로 했다. 아이들은 조잘거리며 가다 미영이네 집에 들러 미영이를 불렀다. “미~여엉~~~” 미영이는 기다리고 있었든지 이름을 채 다 부르기도 전에 이미 봉당(뜨락)에 내려서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연희네 집 봉당(뜨락)에는 누가 왔는지 신발이 두 켤레 더 있었다. 방에는 치하랑 국헌이가 벌써 와 있었다. 매일 보는 얼굴이 뭐가 그리 반가운지 조잘조잘 작은방이 터질 것 같았다.


“야, 야, 그만 떠들고 우리 게임 해여. 내가 오늘 뱀 사다리 게임판 들고 왔어여.”


치하가 외투 안쪽에서 게임판과 주사위를 꺼내놓았다. 말이 없으니 성냥을 부러뜨려 빨갛게 화약이 붙은 부분과 아랫부분으로 구분을 해서 말을 만들었다. 가위바위보로 편을 갈랐다. 치하, 미영이, 식이 세 명이 한 팀이 되고, 향숙, 연희 인숙이가 팀이 되었다. 국헌이는 심판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게임해서 무슨 내기할까?”

“그러게... 음...”

“뭔 내기 해여?”

그때 치하와 인숙이가 동시에 “우리, 김치 서리하자.”

“아, 난 무서운데...”

“김치 훔치러 갔다가 들키면 어째여?”


다들 걱정을 하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결국 다 같이 김치 서리를 한 번 해보기로 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주사위를 던지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큰 숫자가 나오면 좋지만 6이 나와도 뱀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면 꽝이었다. 하지만 뱀에 걸린다고 다 나쁜 건 아니었다. 뱀을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다들 주사위를 던지면 신이 나기도 하고, 뱀을 타고 미끄러지면 “으악~~” 소리를 내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뱀 사다리 게임을 했다. 조마조마했던 뱀사다리 게임이 끝이 났다. 향숙이네 팀이 3:2로 이겼다.


식이는 게임에 아깝게 진 것도 속상한데 김치 서리를 하러 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 진 팀 아이들은 김치 서리를 어디 가서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긴 팀 아이들은 이불 속에 발 넣고 얼른 갔다 오라고 재촉을 했다. 연희는 맛있는 김치 서리 해오면 라면을 2봉지 끓여주겠다고 했다. 꼬불꼬불 라면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면서도 입에 침이 고였다. 치하가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고 했다.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더니 속마음도 모르는 달빛은 초저녁보다 훨씬 더 밝게 비취고 있었다.


동네 골목에서 발소리가 나니 이웃집 개가 ‘컹컹’ 짖었다. 이러다 김치는커녕 항아리 뚜껑도 열어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게 생겼다고 미영이가 울상을 지었다. 동네 골목을 다녀도 마땅히 누구네 김치를 서리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골목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리니 이 집 저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밤을 깨웠다. 치하는 동네가 시끄러우니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부모님께서 주무시는지 마실(근처에 사는 이웃에 놀러 감)을 가셨는지 방에 불이 없었다. 아이들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였다. 치하네 개도 치하가 주인이란 걸 아는지 한번 컹 하고 만다.


연희네서 들고 온 커다란 양은그릇에 김칫독에서 김치 두 포기를 꺼내 담았다. 치하 손이 김치 양념으로 빨갛게 물들었지만 아랑곳 않고 김치 그릇을 들고 냅다 뛰었다. 뒤에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데도 아이들 가슴은 쿵덕쿵덕 절구를 찧었다. 후들거리던 다리는 한참을 뛰어 잰말랑의 연희네 집이 보일 때쯤 진정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제야 걸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연희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연희가 끓여 놓은 라면이 방 한가운데 놓여있었다. 꼬불꼬불한 라면은 어디로 가고 가락국수처럼 매끈하고 퉁퉁한 면발만 양은 냄비 속에 들어 있었다. 그래도 다들 둘러앉아 치하네서 서리해 온 김치와 한 젓가락씩 후루룩 면발을 넘겼다. 퉁퉁 불은 라면이 그리 맛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서리해 온 김치로 아삭아삭 겨울밤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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