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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마음 Jan 15. 2022

[집장이 그리운 날] 배추적을 부친다는 것

배추전




둘째를 임신하고 입덧에 일어나지를 못했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하루가 십 년 같은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새로운 생명이 내 몸속에서 자라는 것은 우주가 경천동지할 일이었나 보다. 입덧은 나라는 사람을 송두리째 사그라지게 하는 것 같았으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메슥거리는 속과 싸움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콩기름 냄새 고소한 배추적이 생각났다. 수많은 음식 중 배추적이라니.


배추적은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배추로 전을 부친 것을 말한다. 평소 배추적을 부쳐 먹지 않았던 사람들은 김치를 씻어서 부쳤냐고 묻기도 한다. 경상도에서는 제사 음식으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다. 헌데 그 제사 음식으로 먹었던 배추적이 먹고 싶다니. 평소에 잘 해먹지 않는 그 배추적이.


배추적의 생명은 두께이다. 밀가루가 두툼하게 붙어서는 안 된다. 짚은 종잇장처럼 얄짝지근해야 한다. 해서 동서들이 있다면 배추전 부치는 것을 서로 꺼려 한다. 해보지 않은 이라면 부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손에 짚(밀가루를 갠 것)을 묻혀가면서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자리의 묵직함이 더 컸던 것 같다. 번거로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사 음식으로 배추적을 부쳐보기 전에는 몰랐다.


나는 둘째 며느리이다. 지금은 졸지에 맏며느리 역할을 하고 있다. 맏며느리가 아니면서 맏며느리 역할을 하는 건 간혹 부담스러운, 편편치 않은 자리이다. 성심껏 하고도 욕먹기 쉬운 자리라고 해야 할까. 8자는 뒤집어도 8 자라고 하더니.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닮는다고 하더니 등등이 생각나게 하는 역할과 자리가 내게 떨어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배추적을 부쳐야 하는 자리가 내게로 왔다. 내게 커다란 프라이팬 앞에 앉아 배추적을 부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건 내가 앞으로 며느리라는 사회적 역할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어느 해 추석 명절을 지내고 연달아 있는 시할아버지의 제사 음식으로 배추적을 부치면서 알았다. 이게 내 팔자구나를. 모든 부분에서 가볍게 살 수 있을지언정 며느리 역할에서만큼은 절대 가볍지 않은 삶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배추적을 부치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였다.


배추적은 고소하다. 배추적은 달짝지근하다. 배추적은 시원하다. 내가 기억하는 배추적은 이랬다. 앞으로 삶을 예상치 못했던 시절에. 입덧으로 내 입맛을 잡아당겼던 그때까지만 해도 배추적은 엄청 달고 고소했다. 하지만 그 배추적의 달근 고소한 맛은 요동치는 입덧과 함께 사라졌다. 달큼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고, 고소함은 하루 종일 맡는 콩기름 냄새로 뒤덮일 뿐이었다. 입맛을 잃을 정도로.


배추적을 그 옛날의 달큰 고소한 맛이 될 수 있게 환원하는 것 또한 내 몫이다. 하지만 내려오는 풍습을 그 집안의 가풍을 하루아침에 뒤흔들 수는 없다. 흔들려서 변할 수 있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틀 안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기둥을 흔드는 것이 아닌 뻗어 있는 가지들을 정리해가는 수밖에. 멋진 나무를 만들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얄짝지근한 배추적을 굽기 위해서는 줄기 부분의 뻣뻣함을 살짝 두드려 줘야 한다. 내 삶의 가벼움을 위해서도 뻣뻣한 줄기를 두드려본다, 부서지지 않게 살살. 배추적의 시원한 맛을 위해 노란 속 부분보다는 배추의 겉잎을 몇 개 떼 낸 다음의 배춧잎을 선택한다. 속 노란 부분도 겉 파란 부분도 아닌 중간, 내 삶에서도 중도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짚은 너무 되직하지 않게 갠다. 두드린 배추에 얇게 짚을 묻혀 번철 위에 올린다. 얄짝지근한 배추적이 되도록 말이다. 덩달아 내 삶도 조금 가볍게 부쳐본다. 지글지글 콩기름이 맛있게 붙을 수 있도록. 배추적을 부친다.



#배추적  #음식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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