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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곳에 잘 있으니 충분하다

by 하루마음




여름이는 작고 약삭빠르다. 크레는 꼬리 길이가 10~15센티미터에 몸통까지 합해도 15~25센티미터 정도가 평균이다. 여름이는 쇼크사로 위협을 느껴 스스로 꼬리를 잘랐다. 다른 도마뱀붙이와 달리 한 번 잘린 꼬리는 재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꼬리가 없다고 문제를 겪지는 않는다. 꼬리가 없는 여름이는 9센티미터가 채 되지 못한다. 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온다. 작은 여름이에 비해 집은 가로 45센티미터, 세로 50센티미터로 넓고 높은 편이다. 크레는 장대 높이 선수 못지않은 점프 실력을 갖췄다. 해서 집(사육장)은 넓은 것보다는 높은 것이 좋다.


넓고 높은 공간에서 살면 더 높고 넓은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나 크레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여름이는 틈만 나면 집에서 탈출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이런 것을 보면 자기 외부에 주의 집중하는 E인가 싶다가도 숨는 것을 좋아해 사육장에 아늑한 은신처가 필요하거나 종일 물구나무서듯 거꾸로 벽에 붙어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자기 내부에 주의 집중하는 I이기도. 나는 여름이의 이런 양면성에 종종 휘말려 식겁을 한 경험이 서너 번이다. 아니, 기회를 기다리는 녀석의 간절함일까. 간절하게 바라면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든가.


출근 준비로 씻고 나왔더니 여름이 집 문이 열려있다. 금방 세수하고 왔는데 눈곱이 착 달라붙은 듯 눈앞이 캄캄하다. 문이 왜 열렸을까. 아득했다. 눈을 비비고 여름이 집 안을 훑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찾았지만, 없다. 머리를 쑥 넣어 살펴보았지만 여름이가 보이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머리를 쑥 들이밀긴 했지만 내 머리통이 여름이 집에 꽉 차 더 찾을 수가 없다. 여름이 집에서 머리를 빼고 다시 찬찬히 구석구석 보았다. 여전히 없다. 여름아, 여름아, 애타게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출근 시간이라 마음은 콩을 볶고 여름이는 어디에서도 기척이 없다. 팔 길이만큼 긴 핀셋으로 여름이 집 제일 안쪽에 놓여 있는 나무껍질 판을 들썩였다. 숨바꼭질하듯 숨는 것을 좋아하는 여름이가 즐기는 공간이다. 귀뚜라미를 줬던 핀 세이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핀 셋 입질을 몇 번 시도했지만 여름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장롱 위와 아래를 살폈지만 없다. 책장 뒤며 커튼 뒤에도 샅샅이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책으로 가득한 방은 여름이에게 정글이다. 여름이가 숨을 곳이 곳곳이다.


J의 말에 의하면 한 달 반 만에 나온 사례도 있다고 했다. 한 달 반이든 두 달 반이든 내 품으로 돌아온다면 상관없지만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는 로댕처럼 가만있는 습성이 있기에 혹시나 하는 못된 생각에 두렵다.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어 나오지 않으면 찾을 방도가 없다. 맥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다. 더 지체하면 회사 지각이다. 탈출했던 여름이가 자기 집으로 들어올 수 있게 여름이 집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가야 할까. 방 밖으로 나가면 더 찾을 수 없으니 내 방문은 꼭 닫고…. 미처 생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뭇가지 아래 능청스럽게 까만 쥐눈이콩을 하고 바라보는 눈이 있다, 여름이 집 안에.


여름이는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 장롱 위와, 아래에서 하룻밤을 보낸 여름이가 생각나 나는 지레 식겁을 했다. 급한 마음은 가로 세로 40, 50센티미터의 너비와 높이의 여름이 집을 태평양처럼 만들었다. 3분 정도의 짧은 순간, 나는 태평양 바다에서 여름이를 찾아 헤맸다. 순간이 영원 같았던 시간, 혼자만의 잠시 잠깐의 소동으로 끝나 다행이다.


네가 그곳에 잘 있으니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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