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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Sep 02. 2016

소중한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는 일

관찰은 곧 관심의 증거

언젠가 채널을 돌리다 ‘서민 갑부’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시청했다. 주인공은 나이 지긋한 세탁 장인(匠人)이었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바느질하듯, 어르신은 자체 개발한 약품을 사용해 옷에 묻은 얼룩을 정성스레 제거했다.


단골만 수백 명에 달했다. 인근 주민은 물론 타 지역에서 옷가지를 들고 오거나 택배로 부치는 경우도 많았다.

방송은 주인공의 전문성과 재산에 방점을 찍었다. 카메라는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한 금전 출납기를 줄기차게 클로즈업했다. 한데 어르신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일을 처리하면서도 세탁소 한쪽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에,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아들이 의자에 걸터앉아 초점 없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은 몸이 조금 불편해 보였다. 장인은 아들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아들과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고 주름진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는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사연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일이 즐거운 것도 있지만, 사실은 쟤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거야. 죽기 전에 많이 벌어야 해...”


순간, 장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어르신의 얼굴과 손가락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세탁 장인의 눈에 맺힌 물기를 보는 순간 짧은 이야기 하나가 내 머릿속에서 포개졌다.



몇 해 전, 친한 선배가 부친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평소 그는 아버지와 말을 섞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색했다. 그래서 집에서 식사할 때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둘러 밥을 먹고 자리를 떴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동하는 길에 아버지의 눈빛을 떠올리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선배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버지를 향해 “제발 일어나세요. 저 좀 보세요”라고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눈을 감았다.


꽃은 향기로 말한다. 봄꽃은 진한 향기를 폴폴 내뿜으며 벌과 나비와 상춘객을 유혹한다. 향기의 매력은 퍼짐에 있다. 향기로운 꽃 내음은 바람에 실려 백 리까지 퍼져 나간다. 그래서 화향백리(花香百里)라 한다. 다만 꽃향기가 아무리 진하다고 한들 그윽한 사람 향기에 비할 순 없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른다. 향기의 주인이 곁을 떠날 즈음 그 사람만의 향기, 인향(人香)이 밀려온다. 사람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한다.


아버지의 빈자리, 아버지의 인향을 그리워하던 선배는 술자리에서 습관처럼 말했다. "몇 년 동안 아버지와 눈빛을 교환하지 못했어. 내 눈빛을 아버지께 전해주지 않았던 일이, 그게 가장 죄스러워..."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방을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 = 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외면하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쪽에 관심이 없어요” 혹은 “뜨겁던 마음이 어느 순간 시들해졌어요. 아니 차가워졌어요”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일까.


삶을 돌이켜보면,

상대에 대한 관심이 멈추던 순간

상대를 향한 내 관찰도 멈췄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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